10 캔맥을 참아라, 딱 100일만
야식 참기 10일 차.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맥주 한 잔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건 정말 아쉽다. 처음 야식 참기를 한다고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아이들이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나의 음주였다. 맥주 때문에 얼마 못 갈 것이다. 밤이 아니라면 다른 시간에 맥주를 마실 것이 분명하다는 등의 의견이 분분했다. 누구도 나와 맥주를 따로 떼어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맥주를 안 마시고 있다. 힘들 때, 슬플 때, 외로울 때, 기쁠 때, 좋은 날, 특별한 날, 그냥 마시고 싶은 날, 그날이 무슨 날이든 언제든 내가 원하면 찾아와 내 손에 착 감기던 파랗고 시원한 그 목 넘김이 없다.
“엄마, 우리 개학하니까 한잔해요. ”
“엄마, 곧 생일인데 생일, 생일 지나고 시작해요.”
아이들도 나를 먹이지 못해 안달인 그 맥주란.
집안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오고, 안정과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촉매제와 같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맥주 한 잔을 마시면 온갖 안주가 준비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마트에서 두세 가지 이상의 먹거리를 준비한다. 나와 ‘짠’을 해주기 위해 같은 파란색 캔의 탄산수를 준비한다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료수를 사 준다. 안주를 나 혼자 먹겠는가. 6인 가족이 양껏 먹을 수 있게 대량으로 준비한다. 큰 아이들은 종류별 라면을 대령한다. 소시지를 굽는 남편의 솜씨는 예술인데 무려 무쇠 팬을 달궈 제대로 구워준다. 오징어를 구워 주는가 하면 쥐포를 굽기도 한다. 닭발을 시켜 오느라 시내에 들러 한참을 늦게 들어오기도 한다. 치킨은 단골 안주인데 가족 누구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먹는 것만으로 좋겠는가. 나 빼고 다들 조금 먹고 일어나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 술 한잔 기울이는 걸 기다려준다는 건 구실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게임의 세계에 앉아 좋은 시간 보내며 나를 기다려 주고 동무해준다고 한다. 게임을 하고 늦게 자려고 일부러 술을 먹으라고 하기도 한다. 술 권하는 아이들은 집으로 가며 ‘한잔’을 종용한다. 나는 매일 병나발 부는 술꾼이 절대 아닌데도 말이다. 주변에 술 마시는 사람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이기도 하고 나의 술주정을 못 본 탓도 있다. 하긴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무슨 주정을 하겠는가.
나는 한 캔의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곤 한다. 맥주 하나로 내 마음의 안정과 가정의 화목을 모두 가져올 수 있으니 나도 부담 없이 주말 밤이면 한 잔 기울일 수 있었다. 때로는 비행 청소년처럼 혼자 살금살금 냉장고 문을 열고 하나 꺼내와 홀짝이는 맛도 있었다. 그건 나만의 힐링 시스템이었다.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밤이라는 게 문제다. 야식을 끊었으니, 밤에는 물만 마시기로 했으니 술은, 맥주든 소주든 막걸리든 그 무엇이든 마시면 안 되는 것이다. 아~ 원통해라. 딱 그것 하나가 아쉽다. 내 캔맥!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렇게 호소를 하지도 않는다. 한 달 전쯤 대형마트에 갔다가 남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에게 대단한 선물을 사줬다. 거저 주는 선물은 아니고 귀차니즘과 가격 합리성이 합쳐진 결과였다. 캔 맥주가 무려 24개나 든 박스였다. 330밀리리터 개당 가격 800원에 홀려서 남편이 덥석 집어 든 박스다. 가장 가까운 마트에 가려고 해도 5분 넘게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시골집에서 술타령 하는 부인의 심부름을 꽤 오랫동안 안 들어줘도 되는 양이다. 나는 그렇게 난생처음 술 부자가 되었다.
난 술 좀 가진 여자가 되었다. 술이 박스로 있다는 건 참 좋다.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술 마시고 싶다고 아쉬운 소리를 안 해도 되었다. 언제든 원할 때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하나를 꺼내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야식 참기를 하며 그 좋은 기회가 막혀버린 거다. 24개 중 5개밖에 못 마셨는데! 남아있는 맥주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가장 걱정이 되는 건 100일이 되기 전에 맥주가 상하거나, 변질되거나, 맛이 변하거나, 혹여 맥주 거품이 부풀어 뻥 터지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엄마, 맥주 유통기한 알아봐요. ”
아들이 손수 찾아봤다.
“맥주 유통기한 1년이래요. 6개월 지나면 맛이 변할 수 있다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100일 지나고 마시면 되겠다. 그런데 100일 후에도 야식 참기를 하고 있으면 어쩌지?
“엄마, 낮술 해요.”
“엄마 반주로 마시면 어때요? ”
애들이 별 걸 다 안다. 똑똑한 녀석들, 엄마 생각을 끔찍이도 하는 기특한 녀석들. 왜 나를 먹이지 못해서 안달일까.
그러나 나에게 낮술은 용납이 안 된다. 반주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내가 정한 깐깐한 기준이다. 캔 맥주를 하나 마시더라도 야밤에 집에서 남편이 옆에 있을 때만 마신다. 시골에 살아서 언제든 운전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 아이들이 많아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어서 그렇다. 좀 까탈스럽대도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이니까. 아이들은 밤에도 열이 펄펄 끓어 병원에 갈 수 있다. 팔이 부러질 수도 있고, 목에 닭뼈가 걸려 응급실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정신 멀쩡한 남편을 옆에 두고 음주를 해야 하는 이유다.
박스로 사둔 남은 캔 맥주는 아직 안전하다. 그런데 언제 마실 수 있을는지 기약이 없다. 100일이 지나면 정말 축하주 한잔할까? 축 100일을 위하여!
단, 기억할 점은 맥주 박스를 위하여 100일을 달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야식을 참고 건강과 내 뱃살의 안녕을 위해 야식 참기를 하고 있다.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고 당분간 맥주와는 안녕을 고한다. 100일이 기다려진다. 이제 90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