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버린 밥풀을 기억해
압력밥솥 내솥을 스테인리스로 바꿨다. 코팅 벗겨질 걱정이 없다고 했다. 중금속을 조금 덜 먹을 수 있겠다. 단점이 하나 있다. 밥을 다 푸고 빈 내솥은 꼭 물에 불려 씻어야 한다. 밥풀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알고 산 것이니 감수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 그 정도쯤이야. 보통 밥을 퍼놓고 솥에 물을 부어놨다 한나절이 지나 씻는다. 밥은 조금씩 한다. 그래도 남는다. 새 밥을 하고 남은 밥을 가게에 싸가지고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까맣게 잊었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어디다 잘 뒀는데... 가지고 가려고 어디다 뒀더라... 밥그릇에 고이 담긴 그 밥은 찬밥을 거쳐 굳은 밥이 되어 싱크대 위에서 퇴근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챙길 생각도 못하고 나는 너를 잊고야 말았을까?
이런 일이 한두 번이면 글자로 남길 생각을 했겠는가. 20대부터 시작된 건망증. 머리를 탓해야 할까? 치매가 스무 살에도 오는 건가? 20대의 일이다. 믹스커피 노랑 봉지를 뜯어 컵에 쏟아붓고 뜨거운 물을 받으러 정수기로 향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화장실 세면대 물을 받고 있었다. 도대체 화장실까지 오는 동안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요 근래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깜빡이 증상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슈퍼에 뭔가를 사러 간다. 왕창 장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한두 가지, 혹은 세네 가지, 많아야 당장 필요한 몇 가지를 사는데 슈퍼 문만 열고 들어가면 생각이 안 난다. 신기한 건 되돌아가면 생각이 난다.
아침에 챙겨놓은 가게에 필요한 준비물은 늘, 항상 빼먹고 온다. 현관문 앞에 준비를 해놓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은 남편에게 부탁한다. 남편이라고 다를까. 나랑 똑같은 증상이다. 부부가 쌍으로 치매에 걸리면 큰일인데.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필요한 것을 챙겨 차에 실어놓기도 한다.
식품이 아닌 경우, 급히 필요하지 않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식품을 잊고 거실 현관 앞에 챙겨두고 출근한다면 저녁이 되면 그냥 버려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파를 뽑아 놓고 한 여름철에 그냥 나온다거나, 반찬을 해서 담아놓고 쌩하니 출발한다. 으레 있는 일이라 새로 사는 비용과 집으로 되돌아가는데 들어가는 기름값을 비교한 후 대부분 잊고 온 것을 포기하고야 만다.
나에게서 잊힌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나의 발품을 팔게 하는 것들, 가끔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는 모든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그건 치매 방지를 위한 처절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기록하면 다음에는 잊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