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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마리곰 Aug 02. 2020

벨기에에서 온 그녀는 왜 부마항쟁이 궁금했을까

1979.12월 마산 부민병원에서 태어난 네째딸 윤소희

" 부마항쟁에 대해서 알아?

80년 광주 민주항쟁과 비교하면 어떤 거였어?"

 벨기에에서 온 해외입양인 윤소희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부마항쟁이 대체 왜 궁금한 거야.

 오 마이 갓.

그걸 내가 어떻게 설명해!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

2019.8.22

배냇의 페이스북 그룹에 남겨진 메시지.

' 나는 벨기에 입양인이고 올가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마산 애리원에 가보고 싶다. 혹시 동행하여 통역을 해줄 사람을 구할 수 있을? '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곧바로 글을 달았다.

내가 조금 도울 수 있겠다고.

 나는 마산 출신이니까 그쪽에 통역할 친구를 찾아보겠다고 덜컥 글을 달았다.  

생후 5개월 그녀는 1980년 봄, 마산에서 벨기에로 떠났고, 일곱 살이던 나는 80년 여름 서울에서 마산으로 이사를 갔으니 소희와 내동시에 마산 하늘 아래 있었던 적은 없다.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온 가족이  마산을 떠났다. 그 이후 제대로 다시 가 본 적이 없는 마산은 나에게도 그리운 곳이다. 그래선지 마산이란 단어 만으로도 뭔가 강한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니가 셋이 있다니 시 그녀의 언니 중 누군가가 내 친구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여기저기 알아봤으나 결국 평일에 시간을 내어줄 통역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메일로 사연을 주고 받았고 기관들에 전화해 방문예약을 며 모든 상황을 아는 내가 직접 가겠다고 생각했다.  배냇 모임에서는 부담없이 가서 잘 도와주고 오라며 그동안 월 만원씩 모아놨던 회비에서 나의 기차요금을 부담해주었다.


 2019년 9월 18일 부산역

 그녀를 났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스타일의 그녀도, 애 셋 낳고 무서울 게 별로 없는 아줌마인 나도 첫 만남을 앞두고 긴장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지? 말은 통할까? 하는 두려움.

영어는 짧아도 한국말은 잘하니 어쨌든 도움되겠지 하는 맘으로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그녀와 만났다.  


벨기에의 부모님은 어떠셨는지 그곳에서의 삶은 괜찮았는지 하는 질문에 대뜸 그녀가 물었다.

"부마항쟁에 대해서 알아? 80년도에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항쟁과 비교하면 어떤 거였어?"

"WHAT? 뭐? 부마항쟁?"

 대체 그게 갑자기 왜 나오는 건데?


80년 봄.

생후 5개월 그녀는 입양 가기로  예정된 날짜보다 몇개월이나 앞당겨진 어느 날에 군 수송용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에 도착했다.  


갑작스런 아기의 도착에 소희의 벨기에 부모님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벨기에 아버지는  아기를 입양하기로 신청해놓은 상태에서 복잡해지는 한국상황을 스크랩하며 노심초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운 아기가 예정보다 일찍 무사히 도착했으나 소희가 도착한지 얼마안되어 아버지는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소희의 벨기에 어머니. 그녀는 슬픔을 이겨낼 겨를도 없이 먼나라에서 날아온 아기 남게 되었다. 어머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하고 머나먼 나라 한국에서 날아온 아기 소희그대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렇게 해서 소희는 벨기에에서 아버지는 없이 홀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분들이 한평생 소희를 키우셨다. 삶이 녹녹지 않았지만 열심히 키우셨단다. 


 그녀의 벨기에 부모님 이야기는 나에게 이 나라 대한민국입양에 관한 사회정서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계기가 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혼모에게 자신이 낳은 아기를 해외로 입양 보내길 권유하는 한국사회.


 윤소희는 최근 벨기에에 있는 한국기업에 취업을 해서 한국인들도 만나고 한국의 문화나 소식을 많이 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에게 '스카이캐슬' 드라마를 봤냐고 하면서 한국의 교육열이 대단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드라마가  현실과 비슷한 지도 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벨기에에서 자랐는데도 할머니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시키셔서 스카이캐슬 아이들처럼 힘들기도 했다고 하며 웃었다. 나는 그 할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소희가 이렇게 신중하고 똑똑하게 잘 자란 것 같아서 내심 고맙고 기특한 맘이 들었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벨기에의 소희 어머니와 할머니를 만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다.


1980년 봄 소희가 갑자기 예정된 날짜를 앞당겨 벨기에로 가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하니 그것이 바로 '부마항쟁''광주항쟁'이었다. 희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생전에 스크랩했던 기사들을 성장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걱정하던 예비양부모님. 당시 급박한 상황에 군 수송기까지 동원해서 아기들의 입양 일정을 서둘러 해외로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구나. 80년 봄이면 민주항쟁에 계엄령으로 대한민국이 얼얼하던 그 시절이었구나.

부마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서둘러 해외로 보내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떤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난 소희 때문에 부마항쟁도 광주항쟁도 찾아보고 해외입양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학생 때도 열심히 하지 않던 역사공부를 다시 하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궁금해서 눈을 씻고 정보를 찾아봤을 벨기에의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녀는 약 10년 전에도 불교 어느 단체를 통해 모국방문을 했었단다. 그때 친부모 찾기를 시도해볼까 하고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보기도 하는 등 몇 가지 시도를 해보았으나 일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만 실감하고 벨기에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방문(2019)에는 부모 찾기보다는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서류상 자신은 진해 보육원에 있었으나 마산 애리원에서 입양 간 걸로 기록이 되어 있어서 그 부분이 이상하고 궁금했단다. 왜 갓난아기가 한 달 사이에 왔다 갔다 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고.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입양서류에는 기록이 없지만 지난 방문시 홀트에서 자신의 입양 이유가 위로 딸이 셋이 있어서 부모가 입양의뢰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부모에 관한 기록이 홀트 어딘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 궁금증을 꼭 해결하고 싶다고.

윤소희와 함께한 그날 진해의 어느 교차로에서 서서 어디로 가면 친생부모님과 언니들을 만나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진해재활원으로 변경된 과거 진해 보육원과 마산 애리원을 차례로 방문했다. 진해재활원에는 서류 보관이 잘 되어있는데도 윤소희와 정확히 일치하는 아기가 없었고 마산 애리원에는 딱 그 당시 서류만 소실되어 없었다.

벨기에에서 서울로 부산으로 진해로 마산으로. 여기까지 날아와서 문했는데  은 것이 없었다. 그녀와 나는 갓난아기가 왜 시설을 옮겨 다녔는지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이제 적어도 직접 가볼 걸 하는 후회는 안 하게 되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꼭 사주고 싶었으나 자신이 꼭 사고 싶다는 소희가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으며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다행히 며칠 후 소희는 서울에 올라와서 미리 상담 예약해놓은 아동권리보장원에 방문하여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아동권리보장원에는 프랑스 쪽 유럽을 담당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다. 그분의 출근 날짜에 맞추어 방문상담 날짜를 진해와 마산을 다녀온 다음으로 잡아놓았 아동권리보장원 방문은 소희가  혼자 방문했는데 우리가 진해와 마산을 오가며 확인했던 보육원 및 홀트 같은 입양기관의 모든 서류는  서울의 아동권리보장원에서 한 번에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입양 관련 업무를 전담하던 중앙 입양원 아동권리보장원으로 통합되었고 전국 각지의 서류들을 스캔하여 데이터베이스 화하고 있었다. 아직 모든 서류를 다 전산화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수집하고 있고 국가기관으로서 책무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윤소희가 한국에 방문한 2019년 당시가 기관이 통합되는 과정 중이라 일시적으로 홈페이지가 작동하지 않기도 했으나 메일과 전화로는 소통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과거. 그녀가 태어난1979년 12월 당시 마산 애리원에 아기가 너무 많아서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해 보육원으로 잠시 위탁되어 보육되었기에  그곳에 기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은 홀트에서 말로만 전하고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자료를 아동권리보장원을 통하여 끈질기게 요청하여 볼 수 있었다. 한국의 부모님이 홀트에 위탁할 때 상담하였던 상담서류였다. 부모님의 나이 성격 외모 입양의뢰 이유등이 상담원에 의해 기록되어 있는 자료였다. 그 자료를 확인한 소희는 비록 친생부모님을 찾을 수는 없지만 궁금했던 모든 상황이 명확해졌다고 속 시원해하였다. 게다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서류를 통해 자신의 오똑한 코와 하얀 피부는 엄마를 닮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것은 아빠를 닮은 것 같다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보였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해외 입양인들이 부모에 대한 정보를 요구할 때 국내입양기관에서는 정보를 알고 있을 경우에도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부모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상담서류의 존재자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똘똘한 소희가 그런 서류의 존재를 눈치채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입양당시 함께 보내진 서류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의심하며 지냈을 것이다.


 입양당사자이자 부모자식의 혈연관계인 그들에게 친생부모와의 상담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입양의뢰이후 부모의 삶의 안정성을 위해서?

 입양을 의뢰한 부모가 자식을 포기했기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한다고 말한다.

.

자식은 부모를 포기한 적이 없는데 알 권리가 없다..


내 생각은 이렇다.

당시 해외 입양기관에서는 부모가 없는 아이, 고아만을  대상으로 입양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국의 입양기관에서는 부모가 있는것을 알면서도 고아호적을 만들어 아이들을 입양보냈다. 그 당시 정부와 입양기관이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손을 잡고 불법적인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부모와 상담한 자료들의 존재는 그 불법의 증거물이다.


해외입양의 시작은 전쟁고아들에게 가정을 찾아주는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좋은 부모를 찾아준다는 명목하에 우리 사회는 우리가 길러야할 책임을 회피하고 손쉽게 할 수 있는 해외입양사업을  크게 일으켜 고아 수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행히 요즘 국내입양을 활성화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보이고 미혼부모의 자립을 도와주는 손길들이 보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전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이 나라 저 나라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입양보낸 아기는 영원히 아기일 수가 없고 성인이 되어 돌아온 그들은 자신의 부모에 관한 정보를 요구한다.

하지만 절대 부모의 정보를 내어줄 수 없다는 기관을 만난다.


소희가 묻는다.

  부모와 기관이 차단한 정보.

 해외입양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 대한 정보.

그 정보의 주인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윤소희는 79년 12월 6일 마산 서성동 부민 클리닉 (부민 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다음날 부모님의 상담하에 병원에서 곧바로 홀트에 입양 의뢰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40세 어머니는 32세였습니다. 부모님은 마산에 사셨고 이미 딸이 셋이 있는 상황에서 넷째를 양육하기 힘들어 해외입양 의뢰된 것 같습니다.  2020년 현재 아버지는 81세 어머니는 73세 정도 되시고 세 자매인 언니들은 모두 40세 이상이겠네요. 윤소희 씨는 벨기에에서 잘 자랐고 잘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 친가족을 만나보고 싶어 합니다. 한국 가족들도 그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겠지만 이 아이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윤소희 씨는 최근 벨기에에 있는 한국 회사에 다니게 되어 한국 문화를 접하게 되고 한국에 올 기회도 종종 생겨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어릴 때 마산에 살았고 윤 씨 성을 가진 40세 이상의 세 자매가 있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벨기에로 떠나기 전날 배냇 회원들과 함께한 시간. 그녀는 세명의 친언니대신 한국의 여러 언니들을 얻었다. 벨기에의 엄마와 할머니를 위한 한국화장품과 홍삼을 사들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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