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의 대학입시를 앞두고 심란하던 작년 여름. 나는 해외입양인들과 함께 하는시간을 갖게 되었다.
K-10000이라고 적힌 이놈의 노란 파일이 내게 던진 질문의 파장은 꽤 컸다.
일만번째 아이. 코르듈라 기순 예가.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친근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 그녀는 처음 본 사람 같지 않았고 옆집에 사는 언니 같았다.
독일에서 왔다는그녀는 사진 속 노란 파일을 꺼내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3년마다 열리는 해외입양인들의 큰 행사(IKKA2019)참가차 한국에왔고이번 한국 방문은 그녀의 10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그녀의 아들과 딸도 함께 였다.
몇해전 문대통령 내외가 독일에서 해외교포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있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 갔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소망을 담은 그녀의 카톡 프로필사진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기순 씨는입양 당시 한국에서 함께 보낸 입양 서류를 시작으로 그동안 한국을 오가며 꼼꼼히 모아놓은사진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서류며 관련 기관 연락처, 가족 찾기 전단지 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독일에서도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뛰어다녔다는 그녀.
서류의기록에 따르면71년 9월생 박기순, 74년 2월생 박진우 남매는 75년 11월에 대구시내에서발견되었다.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백합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2월 서울 홀트로 옮겨져 생활했고 여름에 남매가 동시에 독일의 한가정으로 입양되었다고 한다.(생일과 이름은 당시 어린 아이였던 본인의 진술로 작성되었거나 임의로 작성될 수 있었기에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녀의어린 시절의기억에 따르면"엄마가 언니와 오빠를 데리고 갔고 자신과 동생은 아빠에게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비탈진 언덕길에서 군인들이 오는 식당을 하신 것 같고 방구석에 술에 취한 아버지가 생각난다. 군인들은 할머니 식당에서 국물 종류의 식사를 한 것 같다. 어느 날 동생과 함께 친척집에 맡겨졌고 그 집에는 남자아이가 둘있었는데 한 아이가 밀쳐서 넘어진 기억난다."
기록에 따르면 남매는 대구 시내에서 각각 발견되었고백합 보육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당시 미군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던 천주교 산하 대구 백합 보육원, (White lily orphanage) 수녀님들이 아기를 돌보시느라 정말 많은 고생들을 하셨다고 한다. (현재는 보육원이 아니고 일반 어린이집이 있다.) 그곳에서 보호되다가 홀트나 다른 기관을 통해 입양 간 아기들이 워낙 많아서 최근 이곳을 방문하는 해외입양인들이 종종 있다. 당시 대구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고아들이 이곳으로 많이 보내졌다고 한다.박기순 씨도 이미 몇 년전에 그곳을 방문하였다. 과거의 자료도 잘 보존되어있고 해외입양인들이 방문할 시 테레사수녀님께서 친절히 도와주시고 계신다.
밝은 성격의 박기순 씨가 과거 이야기를 하며 유일하게 눈물을 글썽거린 순간은 독일의 공항에 도착했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녀는 독일의 공항에 도착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공항에서 그녀는 소리 지르며싫다고 엉엉 울었단다. 마중 나온 양부모가 되실분들은 너무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고. 독일의 양부모님은 원래 다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 한명을 입양하길 원했는데 동생이 함께 있는 아이라고 하니 갈라놓을 수 없다고 둘을 함께 입양하기로 하셨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그곳은 독일공항. 독일 사람들이 붐비는 공항에서 한국말로 안 간다고 엉엉 울고 불고 있는 까만 머리의 여자아이와 어린 아기, 쳐다보는 수많은 사람들, 그 아이들을 달래서 데려가려는 피부색이 다른 어른들. 그녀는 한참 동안 공항 벤치에 앉아서 떼를 썼고 사람들은 지나가며 무슨 일인가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단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던져진 다섯 살 아이는목놓아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그녀의 독일 부모님. 정말 고심 끝에 큰 결심을 하고 너희의 부모가 되어 줄께 하고 용기를 내어 두명의 아이를 반갑게 맞아서 데려가려던 그분들도 그 순간 무척 당황했었다고두고 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혹시 독일에서의 가정생활이 힘들었던 건 아닐까?
독일의 부모님은 그녀와 동생을 사랑으로 키우셨단다. 교사였던 부모님은 혹여 박기순 씨가 학교에 다니며 인종차별이라도 당할까봐 걱정하셨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하고 혹여 그녀가 차별받지 않게 하려고 신경 써서 보호했다. 귀여운 외모의 까만 머리 여자아이는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단다. 하지만 자라면서 피부색이 다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늘 따라다녔다. 남자이고 더 어렸던 동생은 현재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으로 딱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그래도친동생과 함께 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형제자매가 각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생사를 모르기도 하는 다른 입양인들에 비하면 행운이었다.
그녀가 사랑받고 자란 탓일까?
아니면 친생부모와 언니 오빠를 찾겠다는 열망 때문일까? 그녀는 누구를 만나도 쉽게 금방 가까워졌고 낯선사람을 대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다.
독일의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
현재 그녀는 변호사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명의 자녀를 두고 본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주말이면 쾰른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 시간을 보낸다. 인종이 다른 그녀의 독일 아버지와 그녀는 놀랍게 닮았다.
이제 건강이 좋지않으신 아버지를 사랑으로 대하는 그녀. 인종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닮아보이는 건 내 생각일까.
그녀는 현재 독일 입양인 협회의 대표 3명 중 한 명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그녀는 한국 사람들 뿐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의 입양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하고있다.그녀는 2019년에 한국에서 유전자 검사 최면수사를 받고 신문에 기사를 내보기도 했고에 살던 동네로 추정되는 곳을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
가족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 궁금증도 더 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친생가족은 왜 그렇게 찾으려고 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It is natural. Deep inside.
내가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은 총 얼마나 될까. 네 번 정도 만났는데 나는 독일에 아주 친한 언니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종종 보고 싶다. 보고 싶은 마음은 이런 거구나. 자연스럽게 그냥.
그리고 나는 그녀를 위해 작년에 배운 초보 편집 실력으로 유튜브용 영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허접하게 만들기를 한 달쯤 걸렸던 것 같다. 다시 잘 만들고 싶지만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높아져가는 조회수는 좀 더 잘 만들껄 그랬다는 후회가 잔뜩이고 정말 난감한 음악선택이 쑥쓰럽지만 전업주부 아줌마의 첫 영상으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전문가들이 이런걸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YTN에서 하고 있는 것 같다.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