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앞서 우리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주장을 간략히 살펴보았어요. 하우어워스는 교회의 사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되는 것’에 있다고 이야기했죠.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어요. 왜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세상을 바꾸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하우어워스는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우어워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교회는 자신이 속한 국가, 특히 민주주의 체제 국가를 지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이를 지지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인홀드 니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이러한 입장을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하우어워스가 보기에 국가를 돕기로 한 결정은 교회를 망치는 길이었기 때문이에요.
국가를 돕는 것이 왜 교회를 망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가 지니고 있는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우어워스는 국가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뉴비긴의 관찰을 끌어옵니다.
뉴비긴의 진단에 따르면 종교전쟁을 마친 17세기 이후 종교가 담당하고 있던 많은 영역은 국가로 이양되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신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가진 딜레마입니다. 수단에 불과한 국가와 절대권력으로서의 국가가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것이죠. 국가는 국민에게 자신의 권력을 부각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수단이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합니다.
국가의 이러한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는 아주 좋은 도구가 등장하는데,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은 외부에 적을 만들어서 국가의 도구적 수단으로써의 성격을 은폐시키고, 모두의 생존을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게 해 주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국가는 흔들리는 국가의 정체성을 전쟁으로 굳건히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권력을 얻어내고자, 무작정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악 처단과 민주주의 수호, 국가의 안녕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존이라는 명목은 전쟁을 “선한 전쟁”, “의로운 평화”로 포장해 줍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우어워스가 국가를 돕는 교회 모델이 왜 교회를 망가뜨린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방식, 즉 거짓 평화를 꾸며내는 방식으로 성립된 정의는 기독교 신앙과 합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정의관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절대권력을 유지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차원에서 형성됩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이러한 국가를 돕는다고 나서서 국가 체제를, 심지어는 전쟁까지도 옹호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방식과는 동 떨어진 것일 겁니다.
오늘날 전개되는 사회운동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운동가들은 하나님 없이도 평화와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전제라기보다, 자율적 이성을 긍정하는 현대 세계의 전제에 가깝습니다. 이에 하우어워스는 하나님이 소거된 “평화”, “정의” 등의 개념은 빈 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과제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평화와 정의라는 말의 뜻은 알 것이라는 가정하에 교회가 선택한 구호들, 즉 “평화”와 “정의”라는 거창한 말들은 내용이 텅 비어 있는 말일뿐이다. “교회는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을 떠나서는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희생과 고난을 뺀 채, 세상이 말하는 '이기는 정의'나 '힘에 의한 평화'만을 쫓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 없는 평화는 기독교의 평화가 아니라는 뜻이죠.
다소 교회 중심적인 이야기인 것처럼 들리지만 교회가 기독교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우어워스의 골격이 되는 주장입니다.
하우어워스는 두 가지 교회 모델을 대비시킵니다. 바로 리처드 니버의 변혁적 그리스도 유형과 요더의 고백주의 교회 유형이에요.
먼저 니버는 변혁적 그리스도 유형(Christ transforming Culture)을 제시했습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가 세상을 변혁시키셨으니, 교회도 세상 안으로 뛰어들어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니버는 세상이 악하다고 교회가 외면한 채로 있어선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죄로 오염된 세계를 다시금 하나님의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회법과 시스템도 대상에 해당되었고요.
이러한 니버의 주장은 꽤 훌륭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우어워스는 이를 강하게 비판해요. 세상을 바꾸러 들어간 교회가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게 돼버리면서,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도덕 일반으로 전락시키게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교회가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이 교회를 길들여버리는 게 되어버립니다.
하우어워스는 니버의 모델에 대항하여 요더의 고백교회 모델은 내세웁니다. 요더의 고백교회 모델에서 주된 사명은 사회 변혁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고백교회 역시 니버의 모델과 마찬가지로 사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선포 행위의 한 부분으로서 가능해요. 고백교회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십자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고백교회는 [...] 원수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고난당하는 삶을 사는 것, 이러한 일들을 통해 놀라운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면서,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소다.”
이전까지 교회는 니버의 모델을 앞세워, 세상을 변혁하고 설득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우어워스는 이것이 교회의 사명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세상의 도구로 전락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세상의 도구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고백으로 돌아가는 것(Go Back)이라고 하우어워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우어워스의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