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기꺼이 해줄 수 있는 마음

by 혜성
수박 썰어주실 분 구합니다.
건당 15,000원 지급.
아이들이 먹을 수박을 썰고, 씨를 제거해 통에 담아주실 분 구합니다. 건당 수박 3통 기준입니다.

한 중고거래 플랫폼에 알바구함 게시글로 위의 내용이 게재되었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속에서 이 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생각에 빠졌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 때에는, 아빠가 여름이 되면 퇴근시간에 맞춰 수박을 한통 사서 돌아오시곤 했다. 특히 아빠와 나는 '수박귀신'이라는 별명을 나눠 가질 정도로 수박을 정말 좋아했다.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아빠 뒤로 습하고 뜨끈한 공기가 함께 훅 끼쳐 들어왔다. '수박귀신'이었던 나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 함께 에어컨을 켜고 시원한 거실 바닥에 둘러앉아 아빠가 오시기 만을 기다렸다.


아빠는 땀에 젖은 몸을 씻고 나와서 수박을 쪼개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늘 수박을 열에 맞춰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썰어주셨다. 그렇게 분배한 수박들은 각기 다른 크기의 용기들에 나뉘어 냉장고로 향했다. 그 수박들은 우리 가족의 며칠간 더위를 식힐 양식이 되었다. 냉장고 문이 닫혔다고 끝이 아니다. 아빠는 남은 수박 껍질도 잘게 잘라서 집 밖의 화분들에 거름으로 놔두곤 하셨다. 그러면 가끔씩 그것을 먹으러 찾아오는 참새들도 만날 수 있었다.


어렸을 땐, 그것이 그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나도 당연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수박은 너무나도 먹기 어려운 과일이 되어버렸다. 수박을 쪼개어 담을 수많은 용기도 없고, 손질하고 나면 나오는 많은 껍질은 처리하기 부담스럽다. 쪼개기 시작하면 나오는 수박의 즙은 찐득거리고, 좁은 방을 금세 불쾌하게 만들기 딱 좋다. 막상 사 두면 혼자서 다 먹지 못해 무르거나 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수박귀신'이던 나는 여름이 되어도 수박을 안 먹게 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줄 수박을 썰어달라는 알바구함 게시글을 보고 나니, 나의 어렸을 적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수박을 먹던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 수박은 아빠가 가족들에게 해줄 수 있었던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하는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비효율적인 것이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누군가를 위한 진심의 마음은 내가 조금 불편하고 손해 보더라도 기꺼이 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에 다시금 옛 기억을 끄집어내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이런 마음조차 돈으로 해결하려던 그 이도, 그리고 지금의 나도, 어쩌면 그 마음을 잊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번거롭지만 기꺼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다가온다면, 나는 그 이의 마음을 너무나도 소중하고 고맙게 여기고 싶다.

아마도 그것이 사랑의 표현인 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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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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