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의 물결(2) - 한 바탕 비를 쏟아내며

by 혜성
[한 바탕 비를 쏟아내며] 오일 파스텔
나의 마음에 물결이 치던 시기, 그때의 내 모습은 비가 오기 직전의 잔뜩 흐려진 하늘과 같았다.
무언가 쏟아 낼 것이 많은 먹구름이었지만 그것을 비워낼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잔뜩 부풀어 오른 나는 그저 어디론가 자꾸만 숨어버릴 뿐이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내 삶은 올바로 흘러가지 않는다 생각했다.

낮아진 자존감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런 내가 걱정되어 한 달음에 지방에서 서울로 달려와 준 엄마와 몇 개월동안 작은 단칸방에서 함께 지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마치 금방이라도 엄청난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이었다. 어쩌면 더 이상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버린 모습이었다. 나도 나에게 드리운 먹구름이 너무나도 싫었다. 내 머리 위로 드리운 먹구름을 피하고자 나는 내가 사는 이곳을 잠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서 모아놓았던 돈을 다 끌어모아 곧장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렇게 그저 어릴 적 생각만 했던 나라들로 엄마와 함께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나는 제대로 된 여행을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한 달간의 유렵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막상 여행이 시작되자 모든 것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엄마와 함께 유명한 나라의 수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녔다. 한 달이란 시간은 평소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결국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멋지고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작고 소소한 기억들이었다.


비가 한 바탕 퍼붓고 나서 추워진 날씨에 우연히 들른, 파리의 허름한 뒷골목의 바게트 집.
한참 기다리던 트램이 오늘은 휴무일이라며 멀리서 달려와 알려준 일용직 청년.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번쩍 들어서 내려다 주신 건장한 흑인 신사.
길을 잃은 골목 끝 멋진 풍경을 보여주던 포르토의 한 골목길.


유명한 관광지보다도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우연한 계기에 만나 소소한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 그리고 찰나의 행복을 안겨준 장소들이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리스본의 한 숙소에 앉아 엄마와 나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행의 모든 순간들이 전부 다 좋았는데, 왜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소소한 기억들일까?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나는 행복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거의 나는 늘 완벽함 속에서 완성된 행복이 정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이 내가 예상한 궤도를 조금만 벗어나도, 좌절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내가 뜻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던 여정 속에서, 오히려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얻었다. 기차 시간을 착각하고, 길을 잃고, 숙소의 문을 열지 못해 쩔쩔매고, 가고자 했던 곳에 가지 못하는 이런 수많은 실수들을 겪었다. 그것을 통해 나는 매 순간 닥쳐오는 실패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마치 우리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계획하고 선택한다고 해서 내가 뜻하는 대로만 흘러갈 수 없는 인생처럼. 그리고 오히려 그 힘듦 속에서 그저 스쳐가는 인연들 덕에 잘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이 여행에서 나는 모든 것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무작정 다녀온 여행은, 나에게 예상치 못한 여유와 작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마치 한 바탕의 큰 비를 쏟아낸 하늘처럼, 다시금 상쾌한 바람을 불어내며 밝은 해가 떠오를 날을 준비하게 되었다. 어쩌면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던 힘을 빼는 계기도 된 것 같다. 그저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기면 나와 물결은 자연스레 하나가 되어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어두운 하늘은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그러면 어딘가로 바삐 움직이는 먹구름의 흐름처럼 그 어둠은 또다시 나를 스쳐가겠지만

이제는 흐름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다, 함께 흘러가는 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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