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한다고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자기소개를 할 때 꼭 덧붙이게 되는 것이 MBTI이다. 엔프피에요, 인프제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맞는 성향인지 바로 판단이 가능하다. 요즘 MZ세대들은 소개팅을 할 때 나이, 키, 회사 등 기본 정보뿐 아니라 MBTI도 공개한다고 한다.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네 글자로 표현하면 된다니. 세상에서 가장 짧은 자기소개. 단 네 글자로 너와 내가 맞는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럼 이쯤에서 나의 MBTI를 공개해야 할 것 같다. 내 MBTI는 ESFJ이다. 바로 어떤 사람인 지 감이 오시는가. 결과 리포트에 나오는 한 단어로 얘기하자면 #사교적인 외교관 이다. 그동안의 내 삶을 추적해본다면 E가 확실한데 요새는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좋은 거 보니 I도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내 주위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입 모아 얘기하는 건 확실한 J라는 것이다. MBTI가 유행하기 전엔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내가 (결국)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MBTI 유행 후에 다시금 깨달았다. 그 친구들은 모두 P였기 때문이란 것을.
<MBTI 테스트 결과 중>
가끔 로봇처럼 보이는 계획형 인간인 당신!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진 않나요?(뜨끔)
안정적인 걸 추구하는 반면, 애매모호한 건 딱 질색이고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걸 싫어해요 (또 뜨끔)
내가 파워 J인 증거는 많다. 하루의 시작은 계획표를 살피는 일부터 시작한다.
노션, 구글 캘린더로 그날의 일정과 해야 할 일을 살핀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건 출근길에, 저건 퇴근길에 해야지 오늘 나의 동선과 시간 사이에 다시금 배치를 한다. 회사에서도 출근하자마자 다이어리를 펼친다. 오늘의 할 일을 다시 시간 순으로 정리하고 일을 시작한다. 촘촘한 계획표가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미리 기간에 따라 안배를 해두고 일하기 때문에 일정을 미루는 일은 거의 없다. 체크리스트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날의 동그라미가 모두 완성되어 있을 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 꽤 만족스럽다.
J가 가장 빛을 발했을 때는 결혼 준비 기간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결혼이라는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선 꼼꼼한 계획표는 필수였다. 월 별로 해야 하는 리스트를 정리하고, 예산을 세우고 선호하는 예식장을 미리 조사해서 리스트업하고 방문 순서를 정한다. 계획한 대로 하나씩 실행하며 결혼식이라는 도착지까지 무사히 안착했다.
J를 강하게 느끼는 또 하나의 순간은 여행이다. 늘 한정적인 시간 안에 여행할 수밖에 직장인이기에 주어진 일정 안에 최대한 많은 관광 일정을 넣을 수밖에 없다. 여행 갈 때도 동선을 미리 파악해 시간대로 정해 놓고 움직이는 것은 필수다. 혹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여기 찍고 저기 찍고 넘나드는 ‘타잔’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계획표를 지우는 그 순간부터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들 하지만, 계획대로 착착 다녔던 여행이 항상 아쉬운 귀국길에 더 많은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
계획대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상황과 변수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계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게 된다. 늘 부족하니 잘하자는 셀프 자극을 주지만 더 채워야 할 것 같고 부족한 부분만 보인다.
그래서 나도, 가끔은, P처럼 살고 싶다.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길 즐기는 사람,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 ,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걸 통제하려 하고 있는 나의 온몸에 들어가 있는 긴장을 조금은 릴랙스 하게 풀어내고 싶다.
하지만 계획대로 사는 습관이 내 몸에 축적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늘 혹시나 계획이 어그러질까 A-1, A-2, A-3의 대안을 만들고 혹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도 바로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나니까.
왜 나는 여유 있게 살지 못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원래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받아들이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루하루에 미련이 많아 두리번거리며 더 하루를 붙잡고 의미 있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큰 것 일뿐. 계획을 이뤄내는 순간들이 쌓여 나를 성장시켜왔으니까.
책임감과 강박감 사이에 놓여 있는 체크리스트 같은 J 인생이면 어때. 내 삶을 적극적으로 계획을 하고 살아가며 내 삶에 예의를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