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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잇 do it Jun 06. 2022

걷는 사람에게 복이 있나니

출퇴근 시간에 걷는 기쁨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 출근 시간. 내려야 할 곳은 뚝섬역, 뚝섬역 이지만 내 발걸음은 한 정거장인 한양대역에서 멈춘다. 9시가 되기 20분 전. 20분 간 주어진 나의 숨구멍 타임이다.

뚝섬역과 한양대역 사이에는 중랑천이 있다. 귀에 에어팟을 꽂고 한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중랑천을 바라보며 걷는다. 봄에는 벚꽃을 보며, 날씨 좋은 날엔 바지런히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보며 어느 날은 중랑천에 비친 윤슬을 보며 한 줄로 길게 늘어진 차들을 보며 그렇게 걷는다.


출근 시간이면 더 복잡해지고 소란스러운 마음으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가만히 서서 지하철에 몸을 맡기면 발은 조용히 숨 죽이며 멈춰 있다. 한 정거장 일찍 내려 걸으면 그제서야 잠시 일렁 일렁 춤을 추는 듯 하다. 그대로 샛길로 가고 싶은 발걸음을 붙잡고 걷다 보면 신발에도 비로소 숨 쉴 구멍이 생기 듯 몸 안에 나쁜 생각과 기운들이 빠져 나간다.

한 정거장 전 내릴 수 있는 마지노선은 9시 15분 전이다. 이 때는 늘 내릴까 말까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고민을 하지만 9:1의 확률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걷기를 선택한다. 그래야만 나도 그 날 하루를 살아낼 것 같으니까.

4년 전, 어느 날 계단에서 넘어져 양쪽 다리를 다쳐 양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던 때가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물론 화장실 조차 혼자 갈 수 없어 침대 위 생활만을 해야했던  2개월의 시간은 내가 의식이 있던 이래 가장 울적한 날들이었다. 그 이후로 걸을 수 있다는 거 진짜 큰 축복이라고. 걷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깁스에서 보조기로 바뀌고 어느 정도 무릎 굽히기가 가능했던 때부터는 퇴근하고 나와 걸었다. 5정거장 정도. 뚝섬에서 동대문까지. 그 날의 컨디션에 따라 조금 씩은 달랐지만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렇게 걷는 거 보니 다 나았는데 아픈 척 하는 거 아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양 손에 목발과 양 다리에 보조기를 차고 참 열심히도 걷는 처자가 어딘가 안쓰러워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아직 100% 다리가 나은 게 아니라 섣부른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 당시엔 유일하게 내 의지대로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토록 걷는 이유 중 하나는 나와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담아온 소리들을 걷다보면 비로소 하나씩 버리기가 가능해진다. 걸을 때면 바빠서 잠시 외면했던 생각들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묵혀뒀던 여러 고민이 깊숙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아까 그거 말야? 어떻게 생각해? 아 그런데, 저번에 그 얘기, 진심이었어?’ 등등 생각에 질서는 없고 동시 다발적으로 솟아 나오지만 솔직하게 내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하다가 도착지에 다다르면 신기하게도 정리가 된 경우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진지했던 내 고민들이 단순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그래, 걸으면서 봤던 수많은 장면들 중에 나도 그저 하나의 점일 뿐. 나로 꽉찼던 마음이 살짝 누그러지고 세상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기도 한다.


걷기란 이동하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가장 느린 행위다. 효율성으로만 보자면 거의 빵점이다. 특히 생명이 위태로울 때 걸어서 병원에 가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낼 땐 정신적 생명을 일깨우는 건 걷기가 최고다. 얼마 전 읽었던 글 중 창의성을 키우는 작은 습관으로 매일 적어도 1시간씩은 혼자 걸으라는 문장이 있었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 뿐 아니라 창의력까지 기를 수 있는 걷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또 걸어야 할 이유가 생긴 듯 하다.

내일도 출근할 때 중랑천을 걸으려면 평소보다 30분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직장인이라면 아침의 30분은 꽤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람시간을 30분 앞으로 당겨둔다. 걸으면서 또 다른 세상을 마주치는 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을의 중랑천
여름의 중랑천
봄의 중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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