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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새글 Feb 02. 2018

순수에 미친(狂) 예술가의 길

자비에 돌란 <나는 엄마를 죽였다I killed my mother>


  최초에 ‘나-엄마’, 즉 ‘함께’가 있다. 한때 일체였던 모자의 유대는 필연적으로 붕괴된다. ‘나’의 자아가 수긍하는 세계에서 어머니가 분리되고 ‘나’밖에 남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영화는 아들이 어머니를 자기 세계에서 분리하면서 겪는 갈등을 자못 사실적으로, ‘담담하지 않게’ 그려낸다. <나는 엄마를 죽였다>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자의 분리에는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지당하면서도 한 번의 죽음(혹은 죽임)을 각오하는 치열한 투쟁 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살면서 죽여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네 속에 있는 너이다. 그것을 마스터하는 것이 예술이다. 우리는 훌륭한 예술가인가?” 후베르트가 노트에 적어 내려가는 예술관은 ‘죽여야 할 것(그래서 죽인 것)=네 속에 있는 너=엄마’라는 수식으로 명징하게 축약된다. 즉 ‘어머니와 ‘나’의 일치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고유의 예술관이 우리가 모두 훌륭한 예술가냐는 물음을 통해 보편화한다. 예술을 태동하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모태라는 인식은 다음 언술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의 초라한 배는 멀어집니다. 나의 모든 기쁨은 당신의 모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온갖 ‘속임수’ 같은 기교가 난무하는 속된 예술은 이제 막 예술가의 길에 들어서는 아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나-어머니’의 일체 관계에서 어머니를 떼어내는 과정은 그에게는 미학적 감동(‘기쁨’)을 획득하는 최초의 경험인 것이다.

영화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이처럼 어머니를 죽이는 경험에서 오는 미학적 감동을 증폭시키기 위해 ‘시간 비틀기’를 시도한다. 시간의 흐름은 어머니와의 분리 경험을 추동하는 물리적 조건처럼 보인다. 영화는 파편화된 이미지와 슬로·패스트 모션을 통해 시계로 대표되는 정량적 시간관에 제동을 건다. 시간을 앞당기거나 지연시키는 행위는 어머니와의 분리 과정에서 겪는 극렬한 내면의 뒤틀림을 시각화한다. 나아가 주체의 (모성과의) 분리 경험을 또다시 시간과 분리시켜 경험의 순수화를 종용한다. 이러한 탈시간적 경향이 심화되면서 영화의 지향점은 시간이 단지 느려지거나 빨라짐을 넘어서 파편화된 이미지로 멈추어 서는 ‘무시간성’으로까지 확대된다. 즉 시간을 순수한 주체의 분리 경험을 방해하는 ‘속임수’ 같은 물리적 제약으로 여기는 것이다. 디제시스에서 시간을 빼면 이미지만 남게 된다. 따라서 경험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여과된 이미지다. 공간과 대상을 재현하기 전에 선행 배치되는 관련 이미지들은 시간의 맹목적인 유속에 거스르거나 이를 아예 무화시켜 어머니와의 분리 경험을 가장 순수한 예술의 영역에 위치하게 한다.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시간)과 ‘나의 초라한 배’(경험)의 분리를 통한 순수 지향은 이토록 강박적이고 간절하다.

 

영화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순수한 경험은 시간과의 분리를 넘어 시간을 초월한다. 디제시스의 인과는 엄마를 죽이고 싶은 강렬하고 폭발적인 분리의 순간을 중심으로 인식된다. 거듭되는 모성과의 분리를 통해 아들은 본격적으로 ‘훌륭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의 시간은 이제 경험의 광기, 그리고 그 광기가 기여하는 예술관에 귀속된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경험자의 시선에서 상기되는 무지의 시간이다. 흔들리고 끊기는 장면들은 일관된 영상보다는 불연속적인 이미지에 가깝다. 이러한 시간의 탈시간성이 추구하는 ‘순수’는 온전한 나로 향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의 순수에 대한 강박은 ‘엄마’를 시작으로 대상을 끝없이 죽이고 파괴하는 행위를 통하여 실현된다. 세간에서 혹평하는 자비에 돌란식 ‘나르시시즘’은 예술에서 탈각한 것들까지 감싸 안는 경험이 아직 부재하는 데서 촉발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가 일단 사랑하면 그의 사랑은 기왕 사랑하지 않았던 시간까지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리라. 엄마를 죽였던 순수 그대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을, 그와 우리는 아직 모두 기다려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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