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의 새글 Feb 02. 2018

이 또한 무스비의 힘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올 초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은 한국에서도 ‘무스비’, ‘키미노 나마에와’ 등 다양한 유행어를 양산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사춘기 소년 소녀의 감수성을 섬세하게 포착함과 동시에, 거대한 세계 앞에서 그간 미약하게만 다루어졌던 개인의 힘을 연대를 통해 증폭시키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줬다는 호평이 잇따랐다.
  서로를 만난 적 없는 도시를 동경하는 이토모리의 여학생 미츠하와 동년배 도쿄의 남학생 타키의 몸이 뒤바뀌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몸이 바뀌었을 때 다이어리 어플을 통해 소통하던 그들은 이토모리에 혜성이 떨어진 날을 기점으로 서로 몸이 바뀌지 않게 된다. 미츠하를 만나러 간 타키는 그녀의 마을 이토모리에 3년 전 타이메트 혜성이 떨어지면서 그녀는 죽고 마을이 궤멸하였음을 알게 되고, 희미한 기억으로 미야미즈 신사에 가서 그녀가 만든 쿠치카미자케를 마신 후 죽기 직전의 미츠하의 몸으로 깨어나 마을과 미츠하를 구해내고자 동분서주한다. 

<너의 이름은> 스틸 이미지(출처=네이버 영화)


  상식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재난의 힘을 극복한 것은 바로 ‘무스비’ 덕택이다. 미츠하의 할머니는 무스비에 관해 ‘이토모리 근방의 신이자, 실과 사람을 동시에 이어 주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물이든, 쌀이든, 술이든 몸속으로 들어가 서로 모여 형태를 만들고, 뒤틀리고 얽히면서 영혼과 매듭지어지는 것이 무스비라는 것이다. 무스비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미츠하의 할머니가 말한 것이 무스비에 대한 사전적 정의의 전부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재난 앞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 단합하지만, 생의 가능성이 묘연해지는 순간 끝없이 분열되기 시작된다. 급기야 죽음을 통해 실질적인 세계와 단절된다. 무스비는 개인과 생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재난이 야기하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위대한 연대와 소통의 힘이다.
  무스비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깃든 특유의 애니미즘, 샤머니즘의 발로이다. 미츠하가 자신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시점의 타키와 몸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신을 모시는 무녀 가문의 후계자이며, 몸이 바뀌는 일이 그녀의 할머니, 어머니에게서도 이미 발생한 바 있는 가족 내력이었기 때문이다. 샤먼인 미츠하의 할머니와 미츠하를 통해 우리는 자연 만물과의 영적 교감을 가능케 하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읽어낼 수 있다. 무스비가 결국 자연의 순리, 내지는 운명이라는 기의의 기표로 작용한다고 할 때, 자연은 때로 잔혹한 운명의 표상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서사를 추동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는 양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혜성이 미츠하와 타키를 연결해주는 무스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무스비는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 정신에 대한 예찬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일체를 지향하는 초월적인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진이 났다 해서 땅을 버린 채 살 수 없고, 혜성이 떨어졌다 해서 하늘을 등진 채 살아갈 수 없다. 빈번한 자연재해로 개인의 무력함을 깊이 새기고 살아가야 하는 일본인들에게 자연과 운명이 인간에게 내려준 이 위대한 사랑의 힘은 완전한 치유일 수는 없어도 적잖이 위로는 되었으리라. 한국 역시 비록 인재라 하나 2014년 바다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감독 역시 이 영화가 한국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이유 중 하나로 당시의 일을 거론하기도 했다. 삶에서의 투쟁에 지친 우리에게 시공과 생사를 초월한 화합의 장이 주는 감동은 비록 일시적인 봉합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어쩔 수 없이 심금을 울린다. 다만 ‘이름’을 통해 실현되는, 이 또한 눈물겨운 무스비의 힘.

<너의 이름은> 스틸 이미지(출처=공식 홈페이지)


  상식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재난의 힘을 극복한 것은 바로 ‘무스비’ 덕택이다. 미츠하의 할머니는 무스비에 관해 ‘이토모리 근방의 신이자, 실과 사람을 동시에 이어 주는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물이든, 쌀이든, 술이든 몸속으로 들어가 서로 모여 형태를 만들고, 뒤틀리고 얽히면서 영혼과 매듭지어지는 것이 무스비라는 것이다. 무스비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미츠하의 할머니가 말한 것이 무스비에 대한 사전적 정의의 전부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재난 앞에서 인간은 살기 위해 단합하지만, 생의 가능성이 묘연해지는 순간 끝없이 분열되기 시작된다. 급기야 죽음을 통해 실질적인 세계와 단절된다. 무스비는 개인과 생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재난이 야기하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는 위대한 연대와 소통의 힘이다.
  무스비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깃든 특유의 애니미즘, 샤머니즘의 발로이다. 미츠하가 자신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시점의 타키와 몸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신을 모시는 무녀 가문의 후계자이며, 몸이 바뀌는 일이 그녀의 할머니, 어머니에게서도 이미 발생한 바 있는 가족 내력이었기 때문이다. 샤먼인 미츠하의 할머니와 미츠하를 통해 우리는 자연 만물과의 영적 교감을 가능케 하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읽어낼 수 있다. 무스비가 결국 자연의 순리, 내지는 운명이라는 기의의 기표로 작용한다고 할 때, 자연은 때로 잔혹한 운명의 표상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서사를 추동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는 양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혜성이 미츠하와 타키를 연결해주는 무스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무스비는 운명에 대항하는 인간 정신에 대한 예찬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일체를 지향하는 초월적인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진이 났다 해서 땅을 버린 채 살 수 없고, 혜성이 떨어졌다 해서 하늘을 등진 채 살아갈 수 없다. 빈번한 자연재해로 개인의 무력함을 깊이 새기고 살아가야 하는 일본인들에게 자연과 운명이 인간에게 내려준 이 위대한 사랑의 힘은 완전한 치유일 수는 없어도 적잖이 위로는 되었으리라. 한국 역시 비록 인재라 하나 2014년 바다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감독 역시 이 영화가 한국에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이유 중 하나로 당시의 일을 거론하기도 했다. 삶에서의 투쟁에 지친 우리에게 시공과 생사를 초월한 화합의 장이 주는 감동은 비록 일시적인 봉합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어쩔 수 없이 심금을 울린다. 다만 ‘이름’을 통해 실현되는, 이 또한 눈물겨운 무스비의 힘.

<너의 이름은> 스틸 이미지(출처=공식 홈페이지)



작가의 이전글 기차, 거꾸로 가야 제대로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