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을 보고
2000년 1월 1일 개봉한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시간 주행을 비장하게 막아선다. 영화는 부조리한 사회에 적응하며 피폐해지는 한 개인(김영호)의 트라우마를 추적해 간다. 김영호의 트라우마는 그가 속한 사회 전체의 트라우마로 치환된다. 영화는 1980~90년대 시대상에 내재한 보편적 트라우마를 고발하여 20세기 말의 시대상에 종말을 고하고자 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트라우마적 증상이 발발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인자가 모여 하나의 병인(病因)을 완성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징후적인 사건은 물론 5월 광주의 참상이다. 그러나 광주로부터 촉발된 사회 전체의 비극적 시대상에 관한 콘텍스트를 읽어낸다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즉각적 계기가 1999년이 암시하는 ‘IMF 외환위기’에서 시작된 경제적 공황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김영호는 사람을 고문하며 “삶은 아름답다”고 조소한다. 그것은 광주에서 무고한 피를 희생하여 유지된 정권이 이룩한 3저 호황 시기, 그 호시절의 공허한 모순에 닿아 있다. 그 시절은 생명이나 사랑과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가 짓밟히고 군사 정부의 독단에 의해 중앙집권적 경제 효율의 논리로 모든 것이 재단되는 물질만능주의의 서막이 열리는 시절이다. 그렇기에 김영호가 군인에서 경찰로, 또 다시 사업가로 변신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군부 독재에 공헌한 인물이 IMF 직전까지의 자본주의 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영화에서는 이를 통해 정경의 기형화로 인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병폐의 축적을 그리고 있다. 광주의 비극은 청산되지 않았다. 이를 뒤로 한 채 군부에서 촉발된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한국 사회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값을 톡톡하게 치르는 것은, 비록 콘텍스트로 비껴 있지만 매우 징후적이고 충분히 개연적인 내러티브다.
그 ‘값’을 누구보다도 비싸게 치르게 된 김영호는 돌진해오는 기차 앞을 막아선다. 죽기 위해서지만 그가 손을 번쩍 드는 모습은 일견 기차를 돌리라는 요청과도 같아 보인다. 기차는 근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메타포로, 국제적 표준시의 제정에 공헌하는 등 기술주의적 시간관을 추동한 일등공신이다. 영화에서 기차가 주행하는 몽타주로 시각화되는 선형적 시간관이 태동하는 지점도 거기에 있다. 따라서 기차는 앞서 짚은 20세기 후반의 왜곡되고 음습한 한국 사회 그 자체를 은유한다.
그런 기차가 김영호의 죽음을 기점으로 역행하기 시작한다. 기차는 죽음에서 시작하여 그의 트라우마를 추적한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지나친 최초의 시간에서 새하얀 박하사탕과 조우한다. 기차는 박하사탕이 환기하는 인간성의 근원이자 상징적인 원시 고향을 찾아낸다. 기차를 회귀하게 한 것은 김영호의 죽음으로 ‘각성’한 기차-혹은 그 기차에 탄 관객-가 상징적인 원시 고향을 욕망하기를 바라는 영화의 욕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하사탕>이 2000년 1월 1일에 개봉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영화 자체가 20세기를 실은 기차가 돌진하는 철로의 중심에 선 것처럼 느껴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광주, 그리고 IMF라는 두 가지 인자를 동반한 김영호의 트라우마는 김영호만의 것이 아니다. 디제시스 상에서는 김영호가, 현실 세계에서는 <박하사탕> 영화 자체가 주행을 멈추고 잠시 돌아보라고 두 손을 번쩍 추어올린다. 이는 인간애를 상실한 채 기차처럼 폭주하는 자본주의의 폭력적 역사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다. 광주의 군화에 짓밟히기 전의 한 알의 박하사탕처럼, ‘순’수했던 ‘임’이 있는 그곳을 염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