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보다 더 바빠

89세 엄마의 반복과 집착, 그 안에 숨은 이야기

by 서하







"내 말 듣고 있니?"

"엄마, 알겠어요. 벌써 열두 번은 얘기했어요."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투가 나왔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셨다. 그 눈빛엔 섭섭함보다는, 무언가 오래된 쓸쓸함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올해로 89세다.

며칠 전부터 비가 온다고 하더니, 억센 비가 밤새 퍼붓고 오늘 오전까지도 창밖을 세차게 때렸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병원 예약이 잡혀 있다.

"오늘은 가지 말자"라고 말해봐도,

그 말이 통할 리 없는 우리 모녀의 고요한 갈등은 또 시작된다.

어머니는 류마티스과, 혈액내과, 신경과, 비뇨기과, 피부과, 안과… 그 모든 진료과를 순회하듯 다니신다. 모시고 다니는 일도 말할 수 없이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많은 약을 어머니 스스로 아침, 점심, 저녁 시간 맞춰 정확하게 챙겨 드신다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어머니를 돌보는 간호사 같다고나 할까.


장롱 문을 열면, 작은 약국 하나가 통째로 들어앉아 있다.

약 포장지, 설명서, 영양 보조제, 유산균, 흑염소즙까지 빼곡히 정리된 그곳은 어머니만의 질서와 통제의 공간이다.

처음엔 그 모습이 참 짠했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 집착하시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약과 병원 일정이

어머니의 하루를 구성하는 중요한 ‘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안에서 어머니는 스스로를 지켜내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 약들에 대한 집착이 ‘건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려는 집착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 선다.

기억이 흐릿해지고, 자식들의 하루를 따라가기 힘들어지고, 반복해서 물어보는 일이 늘어난다.

어떤 날은 자신이 짐이 된 건 아닐까 걱정하며 눈치를 보게 되고,

어떤 날은 자식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서운해질 것이다.

노인이 된다는 건,

단지 몸이 늙는 게 아니다.

삶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일이다.

‘엄마’, ‘할머니’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하고,

자신의 이름조차 점점 불리지 않게 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어머니는 매일 나에게 묻는다.

“너 지금 어디야?”

“밥은 먹었니?”

그 질문들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다.

“나는 아직 네게 필요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한참이나 늦게 알아챘다.

아니, 아직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다.

엄마의 ‘집착’이라고만 여겼던 반복은,

자식에게 닿고 싶은 애틋한 통로였을 것이다.

“내가 너 어릴 때 어땠는지 알아? 그때 말이야…”

어머니는 또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신다.

나는 어제도 들었고, 그저께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듣는다.

말하는 어머니의 표정, 손짓,

숨을 고르는 그 조용한 모습들까지도 함께 보인다.

노인의 반복은 병이 아니라,

힘 있는 그 순간까지 남아 있는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걸.

어머니는 내일도 같은 말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웃으며 대답해 드릴 것이다.

"응, 알아. 엄마가 항상 그렇게 해줬잖아."

언젠가 나도 그렇게 늙어갈 것이다.

기억이 흐려지고, 말이 겹치고,

사랑이 어설픈 표현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그 반복 속에 담긴 사랑 하나를

더 듣고, 더 기억하고 싶다.




엄마의 집착은, 결국 사랑이었다.

나는 너보다 더 바빠.

내겐 시간이 없다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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