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엄마와 딸, 파주 카페에서 마주 앉은 홍차 한 잔의 오후
순동이 할머니는 파주로 이사를 오시면서,
딸과 함께 크고 작은 카페를 많이 가보실 수 있게 되었다.
서울처럼 길이 막힐 일도 거의 없고,
조금만 차를 몰고 나가면 한적하고 멋진 공간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곳은
“탁 트여서 참 좋다.”
그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담긴다.
굽으신 허리를 조금 추켜 세우시고 ,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시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일.
그게 요즘 내 일상의 가장 잔잔하고 감사한 풍경이다.
어느 날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물으셨다.
그리고 한마디 더하신다.
“비싸면 시키지 마라~”
나는 그 말을 ‘궁금하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오늘의 브런치 메뉴를 살펴본다.
샐러드며 토스트며 예쁘게 담긴 접시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주문한다.
순동이 할머니와의 브런치 타임이 시작된다.
가끔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멋지고 넓은 카페를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가보신 적이 있었을까?
누구를 만나러, 어떤 이유로 들러본 적이 있으셨을까?
아마도 없었겠지.
결혼과 동시에 '엄마'가 되었고,
여자로서의 여유는 생각조차 못하시고
자식들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오신 세월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호사도 어쩌면 순동이 할머니 덕인지 모른다.
그 분 덕분에 내가 더 좋은 공간에, 더 깊은 차 한 잔 앞에 앉게 된다.
할머니는 카페에 나들이 가시는 날이면
장롱문을 열고 한참을 망설이신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분홍색은 어떠니?”
입꼬리에 살짝 미소를 띠고, 콧노래도 슬쩍 흘리신다.
나는 한때 홍차 공부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차 한 잔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이다니!”
처음엔 놀랐고, 나중엔 빠져들었다.
17세기 후반, 홍차가 영국에 처음 소개됐을 무렵,
그건 귀족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우아한 사치’였다.
귀한 찻잎은 자물쇠 달린 은통에 보관되었고,
하인들이 조심스럽게 차( 茶) 를 우려냈다고 한다.
그런 역사를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순동이 할머니와 내가 같은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는 게
왠지 모르게 뭉클해진다.
세월은 매일같이 야무지게 달아나지만,
오늘 이 순간은 천천히 머문다.
할머니는 가끔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신다.
“또 데려가줄라나?”
입으론 말씀 안 하셔도, 눈빛엔 설렘과 눈치가 담겨 있다.
그리고 어느 날엔,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언제 시간 있어?”
“내가 차 한 잔 사줄게.”
그 말 한마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