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때는 말이야 "
무더위에 잠 못 이루는 요즘, 숨조차 쉬기 어려운 열대야 속에서 89세 순동이 할머니도 여름 나기가 점점 버거워지신다.
작년, 오래된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새로 바꾼 스마트 에어컨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내가 외출 중이더라도, 휴대폰으로 실내 온도를 원격 조절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집에 계신 할머니가 덥지 않도록, 조용히 기온을 낮춰드리는 작은 기술이 요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숨을 헐떡이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순동이 할머니가 곱게 꽃단장을 하신 채 현관 앞에 앉아 계셨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날씨에, 이 더위에 대체 어디를 가시려는 걸까.
“어디 나가세요, 엄마? 너무 더운데…”
할머니는 익숙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나 좀 태워서, 이거 건전지 갈아주는 매장 좀 데려다줘.”
5살 아이처럼 뾰로통해진 얼굴, 꿋꿋한 고집.
결국 나는 포기하고,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이마트 4층 A/S 센터로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처음 보는 사장님 앞에서 할머니는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것처럼 인사를 건네시고, 가방 속에서 손수건에 싸맨 물건을 꺼내 펼치셨다.
“이게 뭐여…?”
사장님도, 나도 순간 멈칫했다.
할머니 손엔 50년도 넘은 전자계산기가 들려 있었다.
“우리 애들 이걸로 밥 먹였어요. 나한텐 소중한 계산기예요. 건전지 좀 갈아주세요.”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말씀드린다.
“요즘은 이런 거 부품이 없어서 수리가 어렵습니다. 꼭 필요하신가요?”
그 순간, 순동이 할머니는 계산기를 꼭 쥔 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말없이 입을 여신다.
“딸아, 이거…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다오.”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게 단순한 고장이 아니라, 한 세대가 간직해 온 시간과의 작별이라는 걸 느꼈다.
할머니는 이내 또 다른 물건을 꺼내셨다.
“이 플래시도 좀 봐줘요. 일제야, 일제. 밤늦게 일 마치고 돌아올 땐 골목 어귀서 효자였어요.”
사장님은 그 플래시도 40년은 족히 된다고 하셨다.
“요즘 건전지는 대부분 대용량이라 포장 뜯으면 반품이 안 돼요. 불이 안 들어와도 사셔야 하는데…”
나는 민망한 얼굴로 사장님께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결국 빈손으로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우리는 말이 많아졌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언어로 끝없는 수다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버려다오” 하셨던 그 계산기와 플래시를 나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조심스레 가방 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오늘, 그 많은 세월 그게 뭐길래 버리시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간직하셨을까 잠시 멈추어 이렇게 브런치에 하소연하듯 글을 적어본다.
아마도, 그 물건들 속에는 오래전 엄마의 손길과 마음, 그리고 ‘우리 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참 따뜻했던 우리 때. 그 시절
기계보다, 기술보다 더 소중했던 건 ‘마음’이었다.
이제는 손가락도 류머티즘으로 펜을 잡는 것도 가스레인지 켜는 것도
어려우신 순동이 할머니이시다
브런치글 쓰는 내내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