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의 입학
그 시대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던 시절이다. 남동생은 공립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식 날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예쁜 모자와 원피스를 입고, 엄마가 사주신 너무 마음에 드는 운동화를 신었다. 그것은 엄마의 첫 월급으로 사주신 것이었다.
남동생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투덜투덜 신발주머니를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동네에서는 "무슨 사립초등학교를 보냈냐"며 수근수 근했던 것 같다.
엄마가 내가 입학할 무렵은 아버지의 부재로 가장 아닌 가장으로 살아가시게 될 시점이었다. 무엇이 이 모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까?
우리 학교는 대학교 캠퍼스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곳에, 숲길을 거닐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반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인 이미자 씨의 아들이 진학하여 같은 반이 되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고, 하늘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아무래도 부촌의 아이들이다 보니 방과 후면 음악레슨을 받는 애들도 많았다. 나는 겨우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날들이 많았다.
그런 내게 외국에서 살다 온 은혁이라는 친구가 생겼다. 머리도 곱게 땋고 핀이나 방울도 어찌나 이쁘게 하고 오는지.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하교하려는데 은혁이가 자기네 집에 가서 놀자고 했다. 망설이다 "그래"라고 답하고 처음으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사는 아파트를 가보게 되었다.
은혁이 어머니는 참 좋으신 분이었다. "우리 은혁이는 외국에서 살다 와서 친구가 없다"라며, "○○이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인형놀이도 하고 놀아줄래?"라고 하셨다.
미국 인형을 처음 보았고, 햄이 들어간 미국 라면은 정말 너무 맛있었다. 학교에 다니며 유일하게 기쁨이 되었던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 시절 엄마는 많이 힘드셨을 텐데, 왜 나를 사립학교에 보내셨을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엄마는 6.25 사변이 일어날 무렵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남동생 넷과 여동생 하나를 둔 가정에서, 엄마만 학교를 갈 수 없었다고 하셨다. 농사를 돕고 부엌일을 하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씀하셨다.
전쟁통에 어머니까지 여의셨다고 한다.
엄마에게 '교육'은 갖지 못한 꿈이었다. 그 꿈을 나에게 물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나만큼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해 봄의 운동화는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마가 갖지 못한 배움에 대한 갈망,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간절한 희망, 그리고 딸을 향한 깊은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꿈이었다.
엄마의 첫 월급으로 사주신 그 운동화는 나에게 세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갈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 따뜻하게 남아, 삶이 힘들 때마다 다시 일어설 힘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