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라보, 마이 라이프

순동이 할머니와 함께 걷는 여름밤의 인생길

by 서하



창밖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다. 지방 곳곳에서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날이면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순동이 할머니다

할머니는 방 안에서 세상을 다 들여다보신다. 식사 때마다 듣는 뉴스 얘기들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파악하시고, 아직도 총기가 가득하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누구나가 가는 인생길이 오로지 내길 이지 싶다

부모 자식으로 만나는 길

부부의 길 사제의 길 벗의 길 연인의 길

벌써 중반을 넘은 나 자신이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오롯이 나에게도 차 한잔 내려 주고 싶다

순동이 할머니께도 "힘드셨겠다"라고 토닥토닥해드리며 말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엄마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순동이 할머니는 40대 초반쯤 되셨을 것이다. 단발머리를 하시고 고운 홈드레스를 입으셨던 모습이 선명하다. 그때 할머니는 정말 고우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척이나 어린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빠는 오늘부터 집을 나갈 거야. 엄마 말 잘 듣고 나중에 아빠가 연락할게."

난 이 말을 엄마가 들으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금 생각해 보면 성숙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를 걱정했던 것이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길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마 순동이 할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무책임하셨던 아버지. 그렇게 집을 나가신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 후 한 번, 아버지가 결혼하고 큰애가 3~4살쯤 되었을 때 집 근처로 오셔서 손녀를 안아보셨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또 세월이 20여 년 흐른 뒤, 어느 요양원에 입소하시고 사회복지사로부터 내게 연락이 왔다. 저녁 8시쯤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부녀는 유선을 통한 만남을 가졌다. 수화기를 들고 머쩍이게

말이 없는 내게 아버지는 핏줄을 알아보시는 듯 " 딸아 이 아비가 많이 미안하다 나 찾지 마라 엄마 돌보느라 애썼다 "

20여 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마음이 오간 찰나의 시간.

그런데 그다음 날 요양원에서 연락이 와서 가보니, 새벽녘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노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순동이 할머니를 통해 보는 삶의 무게


지금 내 눈앞에 계신 순동이 할머니의 모습들이 내가 바라보는 고령화의 모습들인 것이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 매년 하늘 한번 쳐다볼 수 없는 구부러지는 등,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십 년의 세월들.

순동이 할머니 말씀대로 아버지만 안 만났더라면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우린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할머니가 혼자서 우리 남매를 키우시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을지 짐작이 된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살림을 꾸려가시고, 우리를 학교에 보내시고, 저녁이면 밥상을 차리시고... 그 모든 일상이 얼마나 버거우셨을까. 그래도 우리 앞에서는 늘 씩씩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

그래도 나와 남동생은 남겨주셨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할머니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 순간 할머니를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없었을 것이다.

폭우가 내리는 밤, 창밖을 바라본다


다음 생에서의 소원

다음 생에서는 우리들 안 만나도 꽃향기 가득한 정원 있는 집에서 순동이 할머니만 사랑하고 사랑하는 멋진 분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할머니만을 위한 인생, 할머니만을 위한 사랑을 받으시길.

40대 초반의 고운 홈드레스를 입으셨던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아름다우시길. 더 이상 세상 걱정 하지 마시고, 더 이상 누구를 위해 희생하지 마시고, 오직 할머니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시길.


순동이 할머니, 멋진 인생이셨습니다. 부라보 마이 라이프.

비가 내리는 밤, 오래 접어 두었던 그리움과 사랑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내일은 맑은 날이 왔으면 좋겠다. 순동이 할머니의 마음도, 내 마음도 모두 맑아지는 그런 날을 만나고 싶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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