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다시 피어나는 생기
“야, 이 바지는 안 되겠다. 허벅지에 붙어. 다리가 짧아 보인다고.”
어느 날 오후, 나는 엄마의 스타일링 클래스를 수강 중이었다.
엄마는 오랜 세월 같은 바지를 해마다 한 벌씩 사신다.
그런데도 막상 외출할 때는 늘 입을 옷이 없다.
내가 괜히 한마디 얹으려 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말.
“너도 이다음에 봐라. 나처럼 허리 아파봐라.”
마음속으로 늘 상기하면서도,
나는 또 무심코 말을 꺼내고 만다.
평소처럼 TV를 시청하시다가
홈쇼핑에서 옷을 몇 벌 주문하셨다.
살짝 기대하며 엄마 방에 들고 들어가 보여드리니,
입어보시곤 한마디씩 평을 하신다.
“이건 무늬가 너무 촌스럽고, 저건 색이 얼굴을 죽인다.”
도무지 쉽지 않은 합격선이다.
엄마는 올해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젊은 시절 명동 우체국에서 근무하셨던 순동이 할머니다.
종로에서 양장점에 옷을 맞추어 입으시고,
가죽 장갑도 깔별로 챙기셨다던 이야기.
기분 좋은 날이면 그 시절을 떠올리며
소녀처럼 웃으신다.
천을 고르고, 단추를 고르던 손끝엔
자신만의 미감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안목만큼은 아직도 또렷하다.
“나이 들었다고 후줄근하게 입으면 안 돼.”
엄마가 자주 하시는 말이다.
요즘 들어 그 말은 더 자주, 더 또렷이 마음에 담아진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엄마는 스스로 실천하신다.
며칠 전, 핑크색 가디건을 입으시고
거울 앞에서 빙그르 돌며 물으셨다.
“이거 괜찮지 않아? 봄바람 같아.”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핑크색은 분명히, 엄마의 생기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소중히 아끼는 옷은
세탁소에 꼭 드라이를 맡기신다.
몇 번 못 입은 옷이어도 예외는 없다.
그리고는 세탁소 사장님 얼굴을 꼭 보신다
이 사람은 제대로 하시겠네 싶으시면
옷을 찾으실땐 음료수라도 간식이라도 들고 가셔
고마움을 표현 하신다
그건 세월을 대하는 태도이고,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며,
어느 날은 내 옷장을 열어보시며
“이 색, 네 얼굴에 잘 어울려.”
하시며 하나하나 꺼내보시고,
어느 날은 내가 스카프를 매고 나가려 하면
힐끗 보시며 물으신다.
“그건 못 본 건데, 새로 산 거여?”
모녀는 눈빛으로 질문하고, 눈빛으로 대답한다.
“엄마, 나 좀 보지 마셔요.”
나도 모르게 웃는다.
나는 거울 속 내 모습보다
엄마의 손길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이 들수록 스타일은 감각이 아니라 태도에서 나온다는 걸,
엄마를 보며 배운다.
기분 좋은 날엔 밝은 옷을 고르고,
아이크림과 영양크림을 정성스레 바르신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언젠가 나도 머리가 희끗해지고,
엄마처럼 천천히 거울 앞에 설 나이가 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괜찮아, 이 정도면 오늘도 나 예쁘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만의 스타일링 클래스를
미소로 건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엄마는 거울 앞에 선다.
핑크빛 가디건을 조심스럽게 걸치며 말하신다.
“음, 이 정도면 봄소녀 같지 않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엄마. 오늘 엄마, 진짜 멋져요.”
그러고는 마음속 으로 한마디 펼쳐본다.
울 엄마, 젊은 날 멋진 남친 하나 제대로 만나게 해줄걸.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낮과 밤이 오가듯
모녀의 대화도 그렇게 일상이 되어 흘러간다.
나도 두 딸이 있다.
2030년을 바라보는 지금,
혼자 척척 잘 노는 엄마가 아마 더 좋을것 같다
오늘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온라인 강의를 시청하고 ,
손녀를 위해 AI 그림책 동화를 밤새워 만들어본다.
순동이 할머니의 스타일링 클래스는
이내 다가올, 나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