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막상 퇴원할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의사 처방대로 집에서 가만히 있기 위해 넷플릭스 속 미드를 한참 보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내 폐엔 왜 또 구멍이 났을까? 10대 남성들이나 흡연자들에게 주로 발생한다는 기흉은 나에게 8년 전에 한 번, 2주 전에 한 번 발생했다. 내가 추측한 원인은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스물셋에 잠깐 앓았던 폐렴 때문에 폐에 상처가 남았기 때문에. -엑스레이 상에서도 하얗게 보인다.
두 번째, 대학 다닐 때 문학 동아리를 많이 했는데, 그때에는 실내에서도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폈는데, 아마도 간접흡연으로 인해 폐에 상처가 많아진 것일 수도. -기흉 수술을 하고 나서 수술 집도의 가 나에게 와서 수술 과정에 대해서 얘기할 때, 담배 피운 사람의 폐와 같다고 했다.
세 번째, 여성 호르몬 과잉으로 인한 월경성 기흉일 수도 있다. -생리가 시작할 때 기흉으로 인한 통증을 처음 느꼈다.
유력한 세 원인이 나에게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내가 바꿀 수 없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인은 과거의 일이고, 세 번째는 즉각적인 해결 방법으로는 피임약으로 호르몬을 낮추는 방법이 있지만, 일시적일 뿐 아니라, 아이를 갖고자 하는 나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고 호르몬으로 인해 매번 기흉이 걸리는 것도 아니니, 이 방법을 쓸 순 없다. 여성 호르몬 과잉이 환경 호르몬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환경 호르몬을 낮추는 중장기적인 해결책으로는 충분한 채식과 수분 섭취 등이 있다. 그런데 몇 년 간의 경험으로 몸이 좋아지는 느낌은 드나 호르몬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추측한 원인이 맞긴 한 걸까?
증상은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나 그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미드의 닥터 하우스가 천재고, 괴짜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많은 변수를 고려하고 병원을 추측하는 건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학은 증상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대해선 오랫동안 침묵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의 원인을 추측을 한다.
밥을 조금 먹어서 그런 거 아니냐 하는 것부터 체질이 약한 거 아니냐,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 아니냐는 등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병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마주했을 때 나름대로의 원인을 찾아야 그 병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있는 느낌은 안정감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정하기 위해 원인을 찾는 데에 익숙한 것이다. 안정하지 않으면, 계속 긴장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건 그들과 상관없는 내 문제라는 것이다. 나도 원인을 찾아 통제하고 싶지만,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 안정감을 찾게 했던 통제의 착각을 금방 깨게 되는 경험이 잦았고, 무력감을 느끼고 고통 앞에서 작아지는 걸 경험했다. (밥을 많이 먹고 체질이 강하면서 생각이 별로 없으면서 건강하기만 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그 원인을 추상적으로, '나'에게 돌린다면?
내가 이 병을 이끌고 온 것이라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다양한 추측이 가리키는 방향은 한 곳, '나'다. 원인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나는 어떤 '나'의 특징이 병에 기여했는지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게 되었다. 추측하고 그에 해당하는 여러 시도를 해봤어도 소용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벌을 받는 것 같다고 반응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볼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사려 깊지 않은 한 마디에 그 추측을 사실로, 정당한 것으로 강화한다. 그리고 통증을 벗어나 고요한 시점에 이르러서는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병을 두려워한다. 막상 병이 찾아왔을 때엔 초연해져 잘 대처하다가 몸이 좀 불편할 정도로 나아지고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지고 떠난 뒤 내가 경험한 상황을 돌이켜보면 또다시 두려워한다. 비현실적인 두려움인 것 같으면서도 현실적이기도 한 것이라, 뭐라 규정하기엔 혼란스럽다.
지독하게 아프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정도의 고통 뒤엔 어떤 보상이 있어야 공평하지 않나 하는. 시각이 잃은 사람이 청각이나 촉각이 민감해지는 것과 같이. 큰 고통을 경험하거나 건강을 상실한 뒤엔 혜안이 생긴다거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식스센스를 갖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실상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가까운 미래조차 잘 떠올리지 못하면서.
점차 미래를 상상하는 게 어렵다. 아주 가까운 미래도 생각하는 게 어렵다. 예를 들어서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나를 상상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나를 제외한 것에 대해선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은데, 나에 대해선 상상하는 게 어렵다. 자유롭게 나를 바라볼 수가 없다.
우리가 아픈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 기억이 재현되지 않게 애를 썼는데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 길을 내달려왔는데도,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던 그곳에 와 있다면?
최근 의학-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뇌가 지배하는 역할이 아니라, 다양한 장기가 뇌에게 정보를 보내고 받는 등 상호작용을 한다. 규칙적인 심장 박동 수가 뇌에게 안정감을 느끼라는 신호를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보다 장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이 더 많아 장이 건강하면 약한 정도의 우울은 경감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뇌에서 보내는 신호로 장기들이 반응할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장기들이 뇌에 신호를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오른쪽 목과 어깨, 가슴이 아프면서 숨이 끝까지 쉬어지지 않고 막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병원에 가기 싫었다. 일주일을 그렇게 있다가 나아지는 게 없어 포털 검색으로 찾은 호흡기 내과에서 기흉이라는 진단을 받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다. 병원에서 만 하루 동안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다가 다음 날 오후에 퇴원했다. 완치가 된 건 아니지만, 흉관 삽입은 하고 싶지 않아 집에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밤마다 불안감이 찾아왔다. 말 그대로 찾아오는 것 같았다. 숨쉬기가 어렵고 답답하다고 느낀 순간, 단숨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다. 강력한 불안감에 압도되었는데, 공황과는 달랐다. 공황은 뇌가 위험을 과잉 지각해 신체적 증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내 경우엔 폐가 뇌에 신호를 보내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았다. 숨쉬기가 답답해 그에 맞는 감정, 불안감을 만들어내는 거다.
요즘 자꾸 피곤한데, 잘 때마다 꿈을 많이 꾸는 듯하다. 지난밤 꿈속에서 나는 온통 하얗게 눈 덮인 산속을 홀로 걷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한 사람이 나타나 길을 안내해주었다. 나의 목적지, 내가 쉴 곳에 도착해, 감사하다고 말하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미 날이 저물고 나 또한 지쳐서 다음 날 그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 가는 곳에 가기로 했다. 소리마저도 삼켜 버린 설원에서 나와 동행했던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꿈속에서도, 꿈에서 깨어나서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기 위해선 애벌레 껍질 안에서 발버둥 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