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에 석사학위를 받은 후로, 딱 9년 만에 다시 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2010년에 졸업을 하면서 어머니에게도, 내 논문 심사위원 중 한 분인 이누미야 교수님에게도 학교에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문화심리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내 욕심의 한계는 석사까지였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취직을 했는데, 그것도 내 맘대로 되진 않았다. 방황 끝에 찾은 유명한 브랜드 디자인 에어전시에서의 커리어는 내 의도와 다르게 중단되고, 또 방황. 업종을 전환해서 입사한 회사는 내가 입사한 직후 몇 배로 확장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회사가 침몰하기 전 내가 먼저 침몰했다. 퇴직 직후 수술을 받으면서 나를 혹사하게 한 몇몇 인물을 떠올리며, 원망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중에 찬란하게 빛나는 나와 마주친 그들에게 여유 있는 미소와 함께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장면을 상상하며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음, 누구시더라. 아, 김 본부장님?"
건국대학교에 문학치료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야 3주 차가 되었는데, 이젠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의 연약한 면이 마구 드러나고 있다. 일단 월요일 아침마다 엄청난 긴장감을 가지고 학교 수업에 임하고 있다는 것! 실수를 하거나 무지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수업에서 내 의견을 밝히기가 어렵고, 용기 내어 밝혔다 하더라도 나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피해가 갔을까 봐(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할까 봐) 과도하게 걱정한다. 누군가가 나보다 뭔가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데, 그 부러움 밑엔 고통이 있다. 사람들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나를 뛰어나다고 여겨주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스스로 유능하다는 느낌을 갖고 싶다. 목과 어깨에 긴장의 무게가 느껴지는데, 난 부족하고 시간은 모자라고 피곤하기까지 하다.
국내에서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해진 알프레드 아들러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해서 신체적으로 우월한 형과의 비교 속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아들러 형은 건강한 데다가 공부도 잘했지만, 아들러는 잦은 병치레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았으며 공부도 형보다는 잘 못했다고 한다. 부모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 아들러는 형을 향한 열등감에 괴로워했으며, 사회에 나아가선 '유대인'여서 열등감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아들러는 자신의 극렬한 열등감 체험으로 인간의 '우월에 대한 추구'에 대해 주장했다. 열등감은 가정과 같은 사회적 상황에서 처음 발생하며, 이 열등감은 모든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려는', '추구하는' 동기유발의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타인이 없으면 열등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이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움직인다. 아들러는 형을 향한 열등감에 오래 괴로워했지만, 몇 백 년 뒤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건 아들러다. 아들러의 형은 '아들러의 형'으로서만 함께 거론될 뿐이다. 아들러를 생각하면, 열등감을 가지는 게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들러는 병적 열등감과 병적 우월감을 따로 구분 지어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병적 열등감은 외부(특히, 부모)의 과보호로 열등감이 손쉽게 과잉 충족되어 스스로 난관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여기고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고, 병적 우월감에 대해선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노력이 수반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과장하는 것으로, 자만하고 타인을 평가절하해서라도 자신을 높이려는 과시적, 강박적인 욕구 추구로 이어진다.
긍정적인 방향의 우월에의 추구는 자신(개인) 뿐 아니라 사회를 포함한 두 가지 수준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는 개인의 안녕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타인의 안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바람직한 우월 추구는 자신의 열등감을 수용하고 자신의 발전과 더불어, 외부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왜 문학치료를 공부하고 연구하려 다시 학교에 왔나. 인간이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의 인간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사람들 속에 가진 이야기를 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그들의 독자가 되기 위해서다. 그리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이 열등감, 아니 열폭을 통해 나와 세상을 조금 더 이롭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