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8_'흑화'의 매력

by 하이디어



18%EB%82%B4_%EC%95%88%EC%9D%98_%EB%B8%94%EB%9E%99%EC%8A%A4%EC%99%84.jpg?type=w1




로맨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드라마 진행 중반이 지나, 여주(여 주인공)가 이전에 자신을 괴롭혔던 못된 년놈들에게 복수하는 걸 '흑화'했다고 표현한다. 밝고 착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이 받은 피해를 되돌려주고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다른 대상을 위협하기도 하는 여주의 모습은, 이젠 힘없는 '내(작품에 투영된 나의 모습)'가 누군가에게 기대어서, 인정받길 기대한다기보다는 스스로 강해지는 (지나쳐서 잔인해지더라도) 선택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꼭 여주만 흑화 하진 않고, 착한 남주도 흑화 하기도 한다. 다만, 흑화라는 표현은 치명적 매력을 담고 있으므로 남녀에 상관없이 매력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최근 인기몰이하는 '부부의 세계'의 주인공 지선우의 모습도 흑화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럼, 드라마 속이 아니라 현실 속 우리도 '흑화'하기도 할까? 그리고 흑화 한다면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내 경우에 드라마처럼 '달라진 보여주겠어'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데에 성공해본 적은 없으나 사귀던 남자 친구의 배신에 고통스러워하고 내 미래에 대해 함부로 폄하했던 사람들에게 시간이 지나 아니라는 것을 내 삶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드라마 인물들의 법칙-한 드라마 내에서 주요 인물 7명으로 이야기 만들기가 현실에는 적용되는 것이 아니어서 과거에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은 지금의 내 옆엔 없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딱히 복수를 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물론 미친 듯이 SNS를 파서 복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린 이미 다른 현실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기도 벅찬데, 굳이 과거를 현재에까지 끌고 올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러나 가끔 상상을 안 해보는 건 아니다. 나에게 인사하는 그들에게 여유 있게 웃으면서 차가운 눈길로 거리감을 형성하는 장면을 떠올려보곤 한다. 아직 실제로 그런 적은 없다.


BLACK SWAN이란 단어를 끌고 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어쩌면 삶에 의도치 않게 드리운 '어두움'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백탁하는 것이 아니라, 흑화 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내 삶에 침범하여 나를 부서지게 한 사건들은 새로운 나를 만드는 계기가 되고, 그 사건들이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나'만의 삶을 꾸려가게 한다. 무너진 횟수만큼 재건한 횟수도 증가하는 것이니, 어쩌면 불행한 사건은 내 안의 힘을 재확인하고 나에게 '선물'처럼 와 있었던 주위 사람들에 대해 알게 한다. 그걸 기억하기 위해 무너지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흉이 벌써 세 번째 발생했는데, 10년 전 수술한 뒤에도 작년 2월에 재발하고, 저번 주 월요일에 또 재발하게 됐다. '월경성 기흉'으로 세계에 약 250명밖에 없다고 하는데, 기흉이라는 것이 '한 놈만 패듯이' 걸리는 사람만 계속 걸린다. 두 번째 재발이 일어나면, 또 재발할 확률은 90% 이상이 된다. 세 번째 재발하면, 또 재발할 확률은 99%가 된다. 월경성 기흉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궁내막 조직이 폐에 붙게 되고, 호르몬 수치가 높아질 때마다, 즉 월경을 할 때마다 기흉이 생길 위험이 있다. 기흉은 흉관 삽입과 산소 치료를 주로 하는데, 수술까지 한 경우에는 월경성 기흉이라도 재발 확률이 5% 정도로 낮아진다. 재발한다고 해도 2년 안에 재발할 확률이 높다. 이 정도면, 나는 위험할 소수의 확률에 해당하면서 재발 확률은 매우 높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볼 수 있는 수술은 화학유착술인데, 폐에 화학약품을 묻혀 염증 반응을 일으켜 폐를 흉막에 붙여버려 기흉을 차단하는 것인데, 이 또한 수술 후 재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안 하기로 했다. 저번 주 화요일에 입원해서 금요일에 퇴원하면서 입원하는 동안 갈비뼈 사이에 흉관을 삽입해서 공기를 뺐으나 흉관을 빼고 다시 기흉이 생겨, 의사는 나에게 화학유착술 여부에 대해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집에 가만히 있기로 하고 현재도 가만히 있는데도 저번 재발했을 때와는 다르게 폐에서 꼬르륵거리며 바람이 새는 게 개선이 안 된다. 다행히 현재 일을 벌려놓은 게 없으므로 집에 주로 있는데도 이번엔 잘 낫지를 않는다. 평소 에너지의 70% 정도밖에 쓰지 못하고 있다. 밥 먹으면서 말을 하면 숨이 차서 어지럽고 걸을 때도 숨이 모자라 기침이 나오기도 한다. 통증은 기흉 초기에만 목 뒤부터 등 뒤로 강렬하게 있고, 며칠 지나면 그냥 허파가 새는 느낌과 마른기침, 어지러움이다. 가만히 있는데도 낫지 않아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약간의 우울감도 생긴다. 코로나블루처럼 집에만 있다 보니 생기는 단절감.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리라 기대하며(폐를 들여다볼 수 없으니 나아지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집에만 있는다.



나도 이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더 흑화 하리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17_뛰어나지 않아 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