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겠다고, 특히 소설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부터는 글 쓰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 오히려 사소한 글 쓰기마저 피하게 되었다.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많은 이야기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잠들기 전에 겪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아침이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지만, 잠을 자기 위해 어둠 속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면 그대로 내가 깨어나지 못할까 봐 무섭다. 먼저 잠이 든 신랑의 얼굴을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바라볼 때, 이 사람과 나의 끝이, 세상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날 엄마와의 헤어짐을 생각하면서 내 안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공포감에 소리를 지를 때도 있다. 내 비명에 깬 신랑과 밖으로 나가 마음을 달래고 다시 들어올 때도 있다. 보통 새벽 1시나 2시에 그런다.
어제 병원 수술대에 누워 링거 바늘을 꽂은 손등으로 마취제가 들어와, 아프게 손에서 팔로, 그리고 온몸으로 날카롭게 퍼지는 걸 느꼈다. 약으로 내 몸에서 정신이 어디로 가버린다. 정신이 없는 내 육체에 의사는 내 안에 있는 난자를 채취했고, 내 정신이 몸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몸은 통증과 함께였다. 정신이 사라졌다 돌아오는 그 과정이 점차 싫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을 내가 확인하는 그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싫다.
회복실에 누워있는 나에게 의사가 와, 난자를 채취하면서 초음파 상에서 난자와 비슷해 보였던 자궁내막종을 제거했다고 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그게 양성 난소 종양의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혹인데, 치명적이진 않지만 좋은 것도 아니다.
난자 하나가 나왔다. 지난 9개월간 수술실까지 들어가 그냥 나오기를 반복했는데, 좋은 소식이었다. 심지어 저번 달에는 기흉까지 생겨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아마 내일이면 배아의 형태로 냉동이 될 거다. 시험관 시술을 할 때만큼은 단계별로 마음가짐이 다르다. 난자 채취를 하기 전까진 병원에 가면서도 마음을 비우고 기대를 안 하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배아 이식을 받기 전부터 받을 때까지 준비하면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임신 반응 검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바닥에 앉아 운다. 배와 엉덩이는 주사로 멍들어, 내 몸이 너덜너덜해진 느낌마저 든다.
배아를 내 안에 깊숙이 넣고 2주를 보낼 때는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어떤 얼굴일까, 어떤 목소리일까, 나중에 커서 늙은 내 몸을, 지금의 내가 엄마에게 그러했듯이 안아주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가 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비슷하지만 다른 상상을 한다. 그 상상 속의 나는 드디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목숨보다 아이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운명론적인 만남에 대해 짐작해본다. 지난주 지도교수님에게 물었다. "정말 따님이 태어나신 이후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셨어요?" 지도교수님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딸이 태어난 순간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게 됐지." 나 또한 그럴 수 있을까?
심리학자 앤드류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갑자기 우리를 낯선 사람과의 영구적인 관계로 몰아넣는 일이고, 그 낯선 사람이 이질적일수록 부정적인 성향은 더욱더 강해진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에서 우리가 사멸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타고난 특성상 그런 불사의 환상을 깨뜨리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모욕감을 준다.
앤드류 솔로몬, 『부모와 다른 아이들』
내가 불멸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걸 아이를 통해 더 명징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사라짐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지도교수님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병원에 입원해있거나 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누워있을 때 간호사들이 환자인 나를 조심히 대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이런 보호를 받는 따뜻한 느낌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와선 잊었다가 병원에 가게 되면 다시 아이가 된 그 느낌이 따뜻해서 좋다. 아픈 건 싫지만 나를 대하는 그 따뜻한 손길에는 감사하다.
"엄마."
내가 평생 따뜻하게 생각했던 그 단어로 내가 불릴 날을 기다린다.
그러다가도 점차 시간은 가고 소식은 없으니, 아이 없이 살아갈 시간에 대해서도 상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사는 것도 가치가 있고, 내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며, 그렇게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둘이라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아이 때문에 누군가가 더 희생하는지 다투지 않아도 된다. 노인이 되어서도 좋은 친구가 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흐뭇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내 삶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