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핵심 사건에 대한 자문화기술지
1. 서론
2. 연구방법
2.1. 자문화기술지
2.2. 자료수집과 분석
3. 결과
3.1. 증상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건
3.2. 생애 핵심 사건과 사회적 사건의 연관성
3.3. 의미있는 타인들과의 상호작용
3.4.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의 차이
4. 참고문헌
1. 서론
상담자는 상담 장면 내에서 내담자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로, 상담자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인식은 상담자의 덕목이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윤리적 강령이다. 상담자는 교육과 수련 경험 등에 의해 준비된 역량의 범위 내에서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며, 내담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담자 본인의 신념체계, 가치, 제한점 등을 자각해야 한다. 이로 인해 상담 연구 영역에서 자문화기술지 연구 방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본 연구에서도 문학치료 연구자이자 상담자로서 본인의 내면세계를 자문화기술지 방법을 통해 탐구하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성공적 상담을 위한 중요한 변인인 상담자 개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앞으로 내담자와의 원만한 치료 관계 형성과 상담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란 판단에서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 연구는 생애 사건을 기술한 자료에서 사건 발생 이후에 영향을 미친 네 건의 사건을 ‘생애 핵심 사건’으로 명명하고 증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사회적 사건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며, 그 사건들을 중심으로 의미있는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이 어떠했는지, 고통에 대처하는 본인의 자세는 어떻게 달랐는지 비교 분석하였다.
2. 연구방법
2.1. 자문화기술지
자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는 연구자 자신의 자전적 자료를 활용하는 질적 연구 방법으로, 개인의 주관적 체험을 깊이 성찰하고, 사회 안에서 타인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 자기(self)에 대한 사회, 문화, 정치적 이해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이다. 자문화기술지는 개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형성되고, 이야기되는지 분석함으로써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 맺는 양상과 개인이 속한 세상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최근 자문화기술지적 연구 방법을 통해 상담 영역과 관련하여 외상적(traumatic) 경험, 상실(죽음, 자살 등)을 경험한 사람들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런 경험의 사회문화적 이해와 더불어 자기와 타인과의 관계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다수의 연구들이 수행되었다. 이는 자문화기술지 연구 방법을 통해 트라우마 경험이 개인에게 주는 고통의 흔적과 고통으로 인해 형성된 기억이 갖는 비일관성, 상처의 치유에 대해 탐구할 수 있으며, 트라우마 사건과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적, 상황적 변인에 대한 다면적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문화기술지는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연구자뿐 아니라 자문화기술지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가치 있는 자료로, 연구자와 독자를 성찰로 이끄는 매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2.2. 자료 수집과 분석
본 연구를 위해 2018년 12월부터 2019년 9월까지 작성한 에세이와 심리학 관련 칼럼, 팟캐스트 출현했을 때 한 발언 등을 수집한 자료를 이용했다. 수집된 자료를 통해 ‘생애 사건’ 중 연구자에게 위기와 전환을 경험한 네 개의 사건을 ‘생애 핵심 사건’으로 추려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3. 결과
3.1. 증상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건
생애 핵심 사건 중 첫 번째 사건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발생했다. 늦은 저녁이었고 집에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어머니, 내가 있었고, 이미 성인이 된 두 명의 오빠는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일방적 폭력을 가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현관문까지 물러선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신체적인 압박을 가하며 위협적인 언사와 함께 위기 상황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맞았는지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어릴 때 교회에 갈 때마다 지나가야 했던 양계장에서 칼 아래에 놓인 닭의 비명, 혹은 먹을 것 좀 얻어먹으려고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애먼 발길질에 얻어맞던 개의 비명. 내가 내던 소리도 그 짐승들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언어를 잃은 것 같았고 비명만 질러대는데, 동시에 그런 내가 생경하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한순간에 짐승같이 울부짖는 나와 그걸 호기심으로 관찰하는 나로 분리되었다. 공포에 질려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나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애원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애가 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기를 그만두었다. 그 후 내가 그 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그 밤을 지나쳐 다음 날을 맞이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건 언어를 잃은 짐승의 소리를 내던 나와 그런 나를 관찰하던 나로 분리되었던 느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빈도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 12. 20. 에세이 중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 기억에 대해선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은 반면에 내가 거실에서 비명을 지르고 그런 나를 관찰하는 나, 그리고 할머니가 비명을 지르는 나를 보다가 아버지에게 그만하라고 한 기억, 그 날 내가 느꼈던 공포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느끼는 나’와 그걸 기이하다고 여기며 ‘바라보는 나’로 나뉘었던 경험은 ‘이인증’으로, DSM-5에 진단기준에 의하면 이인증은 비현실감, 분리감 또는 자신의 사고, 느낌, 감각, 신체나 행동에 관하여 외부의 관찰자가 되는 경험을 뜻하며, 그 예로 인지적 변화, 왜곡된 시간 감각, 비현실적이거나 결핍된 자기, 감정적 또는 신체적 마비를 들고 있다. 이인증 삽화는 자기의 전체 혹은 일부로부터 분리되거나 이를 낯설게 느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스스로 감정이나 생각을 인식하면서도 그것과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부터 극도로 심한 경우에는 가끔, ‘신체 이탈 경험’으로 알려진, 자기의 어떤 한 부분은 행동하고 다른 부분은 관찰하는 분리된 경험을 한다. 몇 시간에서 며칠간 지속되는 일시적인 이인증/비현실감 증상은 일반 인구 집단에서 흔하며, 일반적으로 성인의 대략 절반 정도가 일생동안 적어도 1회의 이인증/비현실감 삽화를 경험한다고 보고한다. 이인증은 아동기의 대인관계적 외상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있는데, 신체적 학대나 가정 폭력 목격, 가족 구성원 또는 가까운 친구의 예기치 못한 죽음 등 개인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의 발생으로 촉발될 수 있다.
두 번째 사건은 1999년도로, 내 나이는 16세,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경을 다시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안경점을 찾아 시력검사를 하던 중 왼눈의 시야 중심부가 일그러져 보인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안과 개인 병원을 찾았고 망막 출혈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며 당시 의원급 병원에서는 망막 정밀 검사가 가능한 기계가 없었으므로, 의사에게서 대학병원으로의 안내를 받았다. 뒤에 다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겠지만, 당시 의약분업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이 대학병원 교수급 의사들의 치료 중단으로 이어져, 내 눈에 대한 진료는 6개월 정도 늦춰지게 되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시절 내 왼쪽 눈에서 사물이 일그러져 보인다는 것이었고]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불안과 우울이 사라지진 않았다.]
(2018. 4. 2. 에세이 중에서)
이 사건을 통해 신체적 증상이 어떻게 심리적 증상으로 이어지는지 경험했다. 나는 제때 치료받을 수 없다는 경험을 처음 한 것으로 이 경험을 통해 불안과 우울감이 점차 병리적 증상으로 심해져갔고, 이는 세 번째 사건으로 더욱 심각해졌다.
세 번째 사건은 2001년도로, 내 나이 18세, 고등학교 3학년 대입 수험생이었을 때 수험생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 여름 방학에 발생한 의문의 사건이다. 토요일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 토요일 근무를 하고 온 작은 오빠가 먹는 짜파게티를 함께 먹고 짜파게티를 더 사러 가게에 가던 길에 몸의 이상을 느꼈다. 처음에는 눈꺼풀이 불편하다고 느꼈고 가게로 향하는 길에 눈꺼풀에서 목으로 이어져 눈은 감기지 않고 목 근육은 팽팽해지면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몸의 이상으로 두려운 마음에 집으로 다시 돌아갔고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몸의 이상을 설명하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동네 병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근육 이상이 더 진행되어 목이 역 C자 형태로 뒤로 꺾인 채 굳어버렸다. 목의 긴장으로 잠시 숨을 쉬지 못했고 산소 호흡기를 잠시 착용하고 있다가 대학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 의사 소견서를 받고 병원에 들른 어떤 분의 도움으로 고대 구로병원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고 3 어느 토요일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던 중 몸의 이상을 느끼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눈꺼풀부터 시작된 근육 이상은 목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다시 입으로, 팔로 점차 진행되었다. 고대 구로병원 응급실로 가서도 온몸이 다 뒤틀려버린 상태는 계속 진행되었다. 엑스레이, 혈액 등의 기초 검사 및 뇌 CT 촬영 시 아무 이상을 찾지 못했고 나는 고통에 점차 정신을 잃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고, 집이었다. 나는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이전보다 더 큰 불안과 우울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둠 속에서는 공포에 질려 누워있지 못했고, 처음엔 밤에만 불안발작을 일어나던 것에서 나중엔 낮에도 대중교통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고, 발작의 빈도나 발작으로 가는 속도도 점차 빨라졌다.]
당시 나는 우울과 불안으로 강남의 한 정신과 병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정신과 치료마저 중단하게 되어, 우울과 불안은 더욱 심각해졌고 불안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응급실에서는 추후에 MRI를 찍어야 한다며 구로 병원 내의 신경정신과 진료 예약을 했고, MRI는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사의 판단 하에 우울과 불안에 대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병원 신경정신과의 메마른 약물 중심의 치료방식과 어머니의 비난(“넌 왜 이렇게 유별나니?”)을 견디지 못한 나는 치료를 중단했다.
[불안발작은 계속되었다. 지하철에서 숨을 못 쉴 때가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비닐봉지를 꺼내서 입에 대거나 비닐봉지가 없으면 두 손을 모아서 숨을 쉬었다.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근육 경직과 함께 과호흡 증세가 있는 것 같아 받았던 처치였다. 그러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빈도수가 증가하고 무엇보다 몇 년이나 그렇게 버텨보았는데도 나아지질 않았다. 밤이 되면 혼자서 공포에 떨면서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살았다는 안도감과 밀려오는 피로감으로 조금 잠이 들기도 했는데, 오래가진 않았다.
온 하루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압도된 뒤로, 냉정하게도 그 고통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며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병원을 찾게 되었다. 이미 여러 번, 정신과에서 치료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이전에 내가 병원에서 경험했던 건 모멸감이었다. 그래서 불안발작으로 낮에는 숨을 못 쉬고, 밤에는 공포와 비명으로 날을 새우면서도 병원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2018. 12. 29. 에세이 중에서)
[그 공포는 내가 나에게서 분리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라고 생각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쪼개지고 분리될 것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냈지만, 밤이 되면 자다가 그대로 또 숨을 못 쉬고 죽을 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땐 낮이어서 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만약 밤이라면?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지친 후에 찾아오는 엄청난 공허감. 언젠가 어디서 맞이할지 모르는 미지의 죽음이 두려웠다. 나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데, 어머니는 외면하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관심이 없었다.]
(2018. 12. 26. 에세이 중에서)
1996년부터 2001년도, 내 유년 시절에 경험한 사건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으로 이어졌고, 자기 전 방 안에서 혹은, 사람이 많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경험한 호흡 곤란과 답답한 느낌, 두려움을 동반한 불안발작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자기 전 어두운 방 안에서 불안발작이 시작되면 극도의 공포감으로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 뺨을 때리곤 하다가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언제 그럴지 모른다. 공포에 질려 비명과 함께 뺨을 때리곤 하는데, 나를 저지하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다. (흥미롭게도 오로지 왼 손만 내 뺨을 때린다. 왼 손은 내 통제 권한 밖인 듯하다.]
어떻게든 발작이 지나고 나면 엄청난 공허감이 밀려오는데 불안발작이 높은 자살 시도와 자살 사고와 관련된 것은 이 공허감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공황발작은 다른 불안장애, 우울장애, 양극성장애, 충동조절장애, 물질사용장애 등의 다양한 정신질환과 연관 있는데,
이는 공황발작이 주는 압도적 공포감과 공허감이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엔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점차 정신 질환의 범위가 넓어지고 증상이 깊어지면서 아토피 피부염, 결막염 등의 다른 면역성 질환의 증상이 악화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또한 이 사건 이후로 밤마다 자주 무릎과 팔꿈치 등의 관절로 통증이 있었고, 온갖 검사에도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스무 살, 어느 한밤중에 무릎의 통증이 폭풍처럼 몰아친 적이 있었다. 홀로 방 안에서 그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며 견뎌냈다. 약을 찾아, 방안의 불을 켜려고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통증 때문에 주저앉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그렇게 처절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약을 먹고 일시적인 안정을 찾았을 때는 이미 아침이었다.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긴긴 시간을 아픔에 바쳐야 했다.]
(2019. 3. 4. 에세이 중에서)
이후 약 10년간 관절에 갑작스러운 통증이 발생할 때가 종종 있었고, 30대 들어서면서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이것을 신체화로 볼 수 있을까? 그건 아직 의문이다.
반면, 네 번째 사건은 이전 세 사건이 남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것도 이 네 번째 사건이 나에게 준 긍정적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긍정적 영향에 대해선 이후에 더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증상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네 번째 사건은 2011년도, 28세에 브랜드 디자인 회사에 경험한 것으로 고객사 직원과 미팅 중에서 뒷 목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흉통과 호흡 곤란을 경험했다. 그러나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아직 사원에 불과하고 특유의 차분함으로 그 미팅에서 흉통을 참아내고 미팅을 마친 후 직장 근처 내과를 찾아 엑스레이를 찍고 기흉임을 알게 됐다. 이후 기흉으로 고대 구로병원을 다시 찾아 흉관 삽입과 폐 수술을 받게 되었고 2주간 입원했다. 입원 당일이자 수술 전날 저녁에 갈비뼈 사이에 흉관 삽입을 했는데, 다음 날 수술을 위해 나는 물도 먹지 못한 상태로 진통제 없이 가슴에 꽂힌 흉관으로 인한 통증을 견뎌야 했다. 수술 전날부터 수술 직전까지 나는 지금까지 신체적으로 경험한 것 중 가장 최고의 통증을 경험했다.
[그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기흉 수술을 받기 전 입원해서 약 13시간 동안 진통제 없이 갈비뼈 사이에 꽂은 흉관으로 인한 통증을 견뎌야 했죠. 폐 안의 흉관이 갑갑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생살을 찢고 흉관을 껴놓은 채로 수술을 위해 금식을 하며 견뎌야 했죠. 수술 직후에 회복실을 나와서도 수술의 결과를 보기 위해 엄청난 통증을 안고 CT 촬영과 엑스레이 촬영을 해야 했죠. 이후 병실로 올라와 진통제를 맞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습니다.]
(2018. 9. 20. 심리학 칼럼, 지금 이대로 나를 사랑하는 시간 중)
3.2. 생애 핵심 사건과 사회적 사건의 연관성
그로부터 10년간 개인, 집단 심리 상담을 받고 정신과 병원에서 2-3년간 약물치료를 받는 등 내면의 지옥을 인식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2011년 2월에 발생한 어느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가 이웃집에 김치와 쌀 좀 얻을 수 있냐는 쪽지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은 나의 슬픔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이때에 누군가는 배고파서 죽다니! 나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깊이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적인 힘의 혹독한 시련을 경험하면 성격이 크게 바뀔 수 있다. 시련의 장 밖에서 스스로 어떻게 행동할 거라고 상상한 모습은 실제로 시련의 그물망에 걸릴 때 어떤 사람이 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전혀 비슷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짐바르도, [루시퍼 이펙트]
한 개인의 생애 사건과 당시 사회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탐구해본 것은 개인의 병리적 증상 발현에 관여했을 여러 원인들을 포괄적으로 살피는 과정의 일환으로, 다음으로 다룰 의미있는 타인들과의 상호작용 또한 개인의 증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3.3. 의미있는 타인들(Significant Others)과의 상호작용
내가 유년 시절을 고통의 기억으로 기억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이유 중 가장 절실했던 이유는 타인의 슬픔이나 고통을 동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정보가 있는데, 그중 감정에 대한 정보 또한 엄청난 정보 값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당시 나는 우울하지만 슬퍼하진 않았으므로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한다는 것은 나에겐 ‘정신 건강’의 척도처럼 여겨졌다.
나는 20대 초중반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어려움을 가졌으며, 이는 타인을 신뢰하기 어려우며 나 자신 또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내 문제 때문에 꽂혔던 심리학 이론들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애착 이론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고, 원가족과의 관계에서 형성한 애착이 이후 성인기 연인과 부부 관계의 애착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공부하면서, 이는 나의 애착 형성하는 패턴을 바꾸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애착 형성은 생애 초기에 주로 부모와 형성하는 관계로, 부모는 개인이 처음으로 만나는 의미있는 타인이다. 의미있는 타인이란, 나의 자기관과 세계관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거나 현재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는 대상을 가리킨다. 긍정적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타인은 나를 지원하고 인정하고 나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하지만, 부정적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타인의 경우에는 나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주었거나 나의 삶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의미있는 타인들과의 관계는 개인의 행복감에도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타인이 내 주변에 맞을수록 나의 행복감 또한 높아질 수 있다.
첫 번째 사건은 그 자체로 가정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나에게 부모님은 서로 다른 의미로 고통을 유발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의미있는 타인이었던 부모님과의 관계는 불안정 애착으로, 향후 발생한 세 번째 사건까지 아울러봤을 때, 나는 불안정 애착 유형 중 친밀한 관계 형성에 대한 회피와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는 공포적 회피(fearful-avidant) 유형이었다.
공포적 회피형은 앞서 유아기의 애착 연구를 한 메리 에인즈워스(Mary Ainsworth)가 발견한 ‘양가적 애착’을 성인 애착 연구에까지 확대해봤을 때 가장 근접한 유형이다. 양가적 애착 유형의 아이들은 ‘느끼지만 대처하지 못하는’ 유형으로 엄마가 눈에 안 보이면 엄청나게 당황하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돌아와도 별로 안심하지 못한다. 성인애착유형의 공포적 회피형은 자신과 타인(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겨 친밀한 관계에 대한 갈망은 있으면서 타인에게 거부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친밀한 관계를 회피하기 때문에 내적 갈등이 심하다.
셰이버는 볼비의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 IWM)’ 이론을 받아들여, 생애 초기에 형성된 애착이 성인이 된 이후 만나게 되는 이성친구나 배우자 등의 친밀한 관계와의 애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개인이 어린 시절 했던 애착 경험에 따라 개별적 역사의 내면화를 통한 결과로써 관계에 대한 기대,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감정, 행동의 만성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린 시절 양육자와의 안정적 관계 형성은 청소년과 성인기를 거쳐 관계에 대한 만족감과 안정적 관계 형성을 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볼비의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 IWM)’은 개인의 애착 시스템을 전 생애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생애 처음으로 맺는 의미있는 타인인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경험을 토대로 자신과 타인, 세계에 대한 내적 표상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개인은 자신의 IWM에 근거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상하고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게 된다. 볼비는 생애 초기 양육자와의 애착 형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한 번 형성된 내적 표상은 물론 변화에 저항하긴 하지만,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환경의 상호 영향을 통해 조정, 재구성된다고 보았다.
생애 핵심 사건 첫 번째~세 번째 사건이 있었던 유년기 및 십 대 시절에 나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애착 및 IWM을 통해 나와 타인에 대한 부정적 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어머니의 무기력함을 고통으로 확인하고 불안이 시작된 것 같다. 적당한 치료는 고 2에 받게 되었고,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불안과 우울이 사라지진 않았다. 점점 불안과 우울은 심각해졌으나 내가 할 수 없는 방법이 없었고, 여전히 나는 부모님의 무관심과 무기력 사이에서 어쩔 줄 몰랐다.]
(2018. 4. 2. 에세이 중에서)
특히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상은 세 번째 사건, 근육 이상으로 응급실에 갔을 때 이후 더 극적으로 형성되었다.
[응급실에서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나를 장애인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우연히 어머니와 나를 발견하고는 '어린애가 풍이 온 거 같다'고 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측은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타인의 불행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나는 화가 나서 어머님의 손을 꽉 잡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입이 뒤틀려 말을 할 수 없어, 기이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머, 얘가 왜 이러지?” 어머니는 난처해하며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례한 아주머니에게 화를 전달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 정신은 몸이 뒤틀리기 전과 마찬가지로 온전한데 의사표현 하나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 나는 내 몸속에 갇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달라진 시선에 더 고통스러웠다. "똑똑하던 애가 순식간에 이렇게 됐네. 풍이면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 텐데, 불쌍해서 어쩌냐.” 혀를 차면서 이웃집 아주머니는 사라졌다.]
(2018. 12. 26. 에세이 중에서)
응급실에서 마주쳤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나의 불행을 흥미로워했고 나는 그런 태도에 화가 나지만 평소처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괴로웠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시작됐다. 그 공포는 내가 나에게서 분리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라고 생각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쪼개지고 분리될 것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데, 어머니는 외면하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관심이 없었다.]
[문틈으로 술 취한 아버지가 "나를 갖다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버리기엔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을 곧 벗어나고 말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자마자 모두의 반대 속에, 반대를 하든 말든 상관도 안 했지만, 나는 집을 벗어나 살았다. 그즈음에는 낮에도 숨을 못 쉴 정도의 불안발작이 일어나기도 했다.]
(2018. 12. 26. 에세이 중에서)
아버지의 폭력성과 어머니의 나약함은, 어린 시절 위기에 처한 나를 더욱 불안에 떨게 만들었고, 세상에 대한 공포감과 무관심을 학습하게 되었다. 마크 월린은 저서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에서 트라우마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될 수 있으며, 부모 중 한쪽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경우 자녀가 그 증상을 경험한 가능성이 세 배 높으며 우울증이나 불안증으로 고통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언급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부모에게서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안정적인 애착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자신 또한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저 자식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부수물로 여기는 정도였다.]
[할머니, 아버지, 나 또한 우리는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2019. 1. 28 에세이 중에서)
아버지 또한 할머니로부터 애정을 경험한 적 없었고, 아마도 할머니 또한 부모로부터 사랑과 보호를 적절하게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셰이버 등의 애착 연구자들은 볼비의 애착 이론(IWM; 내적 작동 모델)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애착과 보살핌, 성적 행동 시스템에 대한 도식을 만들어, 애착과 보살핌, 성적 시스템이 상호 영향을 받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한 바 있다. 이는 내가 피보호자로서 안정된 애착을 형성하는 것이 이후 내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에게 도움 행동을 주는 행위로 이어지며, 성적인 접근에서도 타인에게 매력적이고 타인의 매력을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나의 IWM이자 애착과 보살핌, 성적 행동 시스템이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네 번째 사건을 지나오면서 알게 되었다.
[입원 대기를 하며 머물렀던 병원 로비에서 봤던 드라마가 나에게 준 느낌, 수술 전날 밤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는 나에게 어머니가 건네줄 물수건으로 입술을 적셨을 때의 시원함. 그리고 수술 끝나고 다음 날 죽을 먹으면서부터 경험하게 된 나의 대단한 회복에 대한 의지와 실천. 날 찾아와 격려해주며 건넨 사람들의 따뜻함이 아직도 내 안에 머물고 있다.]
(2019. 1. 5. 에세이 중에서)
당시 어머니와 함께 지극정성으로 나를 간호했던 남자 친구는 현재 나와 결혼해 남편이 되어 있다.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세심한 지원이 가능한 사람이 내 곁에 머물러주었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와 별거를 하면서 기존의 나약하고 무기력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생기를 찾은 때였다. 또 이전 사건을 통해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갈까 봐 걱정했다면, 네 번째 사건을 통해서 날 위로해주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2010년의 나에게는 이전과 다르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의미있는 타인들이 많았다.
[입원하면서 즐거웠던 점들 중 하나는 입원실에서 만나는 분들과 연령에 상관없이 친구가 되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침대에 누워서, 혹은 밥을 먹으면서 서로 어디가 아파서 입원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환자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입원했고, 어떤 분들은 그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어느 시점에 그 환자가 극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좌절과 기적이 쉽게 오가는 걸 목격했다. 죽음과 삶이 이렇게 얇은 종이 한 장을 맞대고 있는 것일까?]
(2019. 1. 10. 에세이 중에서)
기흉 수술 후 2주간 흉부외과 입원 중에 병실 동기로 만난 다양한 분들과의 교류 또한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연령과 배경에 상관없이 서로의 병 하나만으로도 이어져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던 아주 뜻깊은 체험이었다.
3.4.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의 차이
영웅과 악당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유년 시절 경험하는 보호자의 부재는 개인에게 생존의 위험성을 높이며, 애착 트라우마로 인해 심적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동일한 애착 트라우마를 경험하더라도 성장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들이 무수히 쌓여 서로 다른 방향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그 차이에 대해서 베일런트는 개인이 사용하는 적응기제의 차이라고 보고 억제, 예상, 유머, 승화, 이타주의 등의 성숙한 적응기제를 많이 사용할수록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건강하게 기능한다고 보았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어빈 스타우브는, 이타심은 개인의 가치관에서 파생되며 학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스타우브는 유태인으로서 어린 시절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족을 도와준 막스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영웅적 행동은 ‘고통에서 잉태된 이타심’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스타우브 가족을 도왔던 막스는 어릴 때 엄마를 잃고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란 뒤 남의 집에 유모로 들어갔지만 그녀가 보살피는 아이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형성하면서 변모했다. 빅토리아 십자 훈장과 조지 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조사를 보면, 두 개의 영광스러운 훈장을 모두 받은 사람들 중에 대가족의 장남이거나 편모슬하의 아들이 많고 어릴 때부터 배려가 몸에 밴 사람들의 비율이 불균형하게 높다고 한다. 이는 고통의 경험이 동일할지라도 개인이 그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나 고통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세에서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이후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인식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통에서 벗어날 때 내가 노력해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이는 개인 내적 의지로도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있는 타인들이 주는 긍정적 메시지 또한 중요하다.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믿음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controllability)과도 연관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한 상황에서 느낀 좌절감에서 벗어나 나의 통제 능력을 점차 증가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생애 핵심 사건 1~3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 억울함, 날 보호해주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원망감 등으로 이어졌지만, 이후 그 고통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고통을 주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상담, 정신과 치료, 치료사 공부 등을 하며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들을 대가 없이 도와주려는 작은 노력과 감사할 항목을 찾아내고 일부러 자주 표현하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싶었다.
[“할머니는 죽는 게 두렵지 않으셨어요?” 흉부외과에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 동기인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일 년 전에 심장이 먹먹해져서 응급실에 실려 와 막힌 심장 동맥을 넓히는 스탠스 수술을 받았다. 수술 시간만 자그마치 10시간이 넘었다고 했다. 혈압도 있고 당뇨도 있어서 수술 경과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해서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할머니의 수술 시간을 견뎠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갑자기 가슴 부근에 통증을 느끼고 입원하신 거였다. “수술이 잘못될 수도 있었던 거예요? 안 힘드셨어요?” “나는 수술대에 누워있었는데, 내가 뭘 힘들어. 수술한 의사 선생님이 힘들지.” “그래도 병원에 빨리 오셔서 수술받으셔서 다행이네요.” “맞아. 내 친구 중엔 그냥 참다가 밤새 안녕했지. 나도 그랬으면……. 지금도 딸이 하도 병원 가보자 해서 왔다가 입원한 거야.” 할머니는 자신의 옷을 살짝 내려, 가슴에 그어진 수술 자국의 일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수술하다가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지.” “무섭지 않으세요? 죽는 거?” “뭐가 무서워. 죽을 때 되면 죽는 거지. 죽는 건 겁 안 나는데, 우리 손녀가 걱정이지.”]
(2019. 1. 10)
나는 죽음이 두려워 공황발작을 일으키곤 하지만, 흉부외과에 입원한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죽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죽음이 두렵고 이 두려움은 어느 정도까지는 평생 달래면서 안고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 번째 생애 핵심 사건이 다른 세 사건과 가장 큰 차이점은 나의 대처다. 나는 기흉이라는 진단을 받고 당황하지 않고 입원 수속부터 모든 과정을 원활하게 해결해나갔다.
[나는 내 걱정과는 다르게 숨을 못 쉬게 되더라도 침착하게 대처를 잘했고, 그 경험으로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는 그 순간이 막상 현실로 다가왔을 때, 생각보다 잘 대처한다. 왜냐하면, 내가 불안할 때에는 불행한 사건이 주는 영향에만 초점을 맞춰서 사건이 주는 영향력에 대해 과대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일을 해결하느라 사건이 주는 영향력에 머무를 수 없어 불행 사건의 영향력이 내 우려보다는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19년 1월 5일 에세이 중에서)
행복을 연구한 심리학자 다니엘 길버트는 자신의 연구 경험을 담은 저서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를 통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강렬한 성공 체험이 우리를 영원히 구름 위에 살게 하지 않는 것처럼 강렬한 실패나 손상의 경험이 우리를 바닥에 떨어뜨린 후에도 우리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중요한 건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긍정적인 정서-행복을 경험하는 가, 이다.”
자주 긍정적 정서,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노력으로 많은 심리학자들이 감사하는 습관과 명상, 이타적 도움 행동을 꼽는다. 이 중 무엇보다 타인을 도와주는 행위로 오히려 도움 행동을 한 당사자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리고 스타우브의 ‘고통에서 잉태된 이타심’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연구자 본인의 생애 핵심 사건을 증상의 관점에서, 사회적 사건과의 연관성, 의미있는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의 차이로 살펴보았다. 이전에 일어난 내 불행이 아직도 내가 위기를 겪을 때 더욱 나를 갉아먹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조금씩 변해왔듯이 나도 다른 평범한 영웅들처럼 내 삶에서 조금 더 세상과 나에게 이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이 글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니체의 문장으로 마치려 한다.
“나를 파괴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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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J. Sternberg & Karin Weis(2006), The New Psychology of LOVE, Yale Books
김지욱, 김명찬(2017), 가부장 표상의 변화과정에 대한 자문화기술지, 예술인문사회융합멀티미디어논문지, Vol.7, No.5.
김태련(2016), 가정위기의 현황과 위험 요소, 이화여자대학교 심리학과 *게재지 확인 불가
다니엘 길버트(2006),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김영사
마크 월린(2016),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심심
마이클 본드(2015), 타인의 영향력, 어크로스
박순용 외 2인(2010), 자문화기술지: 방법론적 특징을 통해 본 교육인류학적 가치의 탐색
박성미(2010), 애착에 따른 애교 선호도 차이,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베셀 반 데어 콜크(2016), 몸은 기억한다, 을유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