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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어 Oct 21. 2020

난 소설가가 될 거야!

 별 대단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 세상에 느낌표를 던지는 소설을 쓰고 말 거라는 생각으로, 회사에 다니면서도 이따금 저녁에 소설 창작 수업에 참여했다.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을 때마다 현재 내가 겪는 일상의 경험들이 훗날 내가 쓰는 소설의 자양분이 될 거라 굳게 믿었다.  

 소설 창작 수업은 대개 전반부엔 기성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을 보며 경외심을 표하고 후반부엔 기성 작가에 비해 스스로의 작품이 얼마나 모자랐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는 주말을 이용해 복제인간의 성장과 고통에 대한 소설을 써냈다. 주인공은 소설에서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걸 알고 충격을 받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물에 빠진 기억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은 복제된 주인공 원형의 기억으로, 주인공은 태어나기도 전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이어지는데……

 약간의 허점이 있지만 꽤 괜찮은 작품을 썼다고 생각하며 내 순서에 맞춰 발표했다. 그러나 내 소설에 대한 합평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깨달았다. 수강생 중 한 명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내 소설을 물고 뜯고 맛보고 퉤, 뱉어버렸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내 소설이 불쌍했지만, 그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기며 애써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설 창작 수업을 이끄는 소설가님까지 그 포식자 같은 수강생의 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건 아니잖아!!!”하며 포효를 할 뻔했다. 난 지성인으로서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하여 자리에 앉은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합평 말미에 내 소설에 대한 변호를 시도하다가 아까 그 포식자에게 걸려 더 호되게 당하며 합평은 마무리되었다.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수강생이 다가와 날 위로하며 복제 인간을 다룰 거라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힘 없이 웃으며, 소설뿐 아니라 소설을 극화한 영화까지 봤다고 답했다. 봤는데, 이런 일이......(아, 괴로워서 더는!)
 
 그리고 새벽, 격렬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잠에서 깼다. 거실로 나와 따뜻한 차를 마셔도 온 몸을 흔드는 자괴감이 진정되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올라 아팠다. 내 귀에 대고 “네 작품은 쓰레기야. 아니, 그것밖에 못 쓰는 네가 쓰레기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작품이 뭐가 잘 못 된 것인가 알아보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소설을 읽으며 나와 다른 점은 옥타비아 버틀러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요인,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느껴졌다. 제대로 집중하기도 어려워, 소설집 뒷부분에 있는 에세이를 다시 한번 읽어봤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로서 편견을 이겨내고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는지, 그리고 옥타비아 버틀러 또한 소설 창작 워크숍에서 “정상적인 글을 쓸 순 없나요?”라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자신의 글을 써왔다는 고백을 읽으며, 그제야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 해가 뜨기 바로 직전에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그래, 다시 한번!” 속으로 외치며 약간의 잠을 더 잘 수 있었다. 벌써 이 일은 3년 전의 일이지만 그 날 새벽에 내가 경험한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옥타비아 버틀러처럼 훌륭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을 통해 독자와 만나 따뜻하게 이야기 나누며, “한 때 제 글이 엉망이라는 소리를 들었답니다.”라고 말하면, 독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는 걸 상상해보곤 한다.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아직도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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