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돌이가 모르는 이주임의 이중생활
퇴근 시간을 알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을 때, 세상은 이미 축축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건물 입구에 서서 잠시 멈췄다. 등 뒤 사무실 안에는 주인 없는 우산이 나란히 꽂혀 있었지만, 나는 굳이 손을 뻗지 않았다.
그대로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머리카락 위로, 뺨 위로, 그리고 드러난 팔뚝 위로 굵은 빗방울들이 불규칙한 리듬을 그리며 떨어졌다. 차가운 촉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우산 없이 걷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라는 감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머릿속을 스친 건 '이거 산성비 아닐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처럼 큰마음을 먹고 비에 젖어보겠노라 호기를 부려놓고는, 고작 빗물의 성분을 걱정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조금 더 낭만적이고 싶었는데, 내 감성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싶어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산이 없어서 그냥 맞고 가고 있어."
무심하게 뱉은 말이었다. 통화를 하는 순간까지만 해도 '비 오는데 마중 나와줄까?' 하는 기대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난 뒤,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작은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현실은 만화나 소설이 아니잖아.'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사랑도, 미움도, 질투도, 그 흔한 행복조차 미적지근하게 느끼는 사람. 뜨거운 열정 같은 건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고 단정 지으며 살아온 무딘 사람. 그렇게 스스로를 정의하며 빗속을 터벅터벅 걸었다. 열정적이지 못한 내가 조금은 한심해 보였지만, 무던하기에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커다란 우산을 쓴 채 빗물을 헤치며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익숙한 실루엣, 처벅처벅 발소리. 그가 가까워질수록 회색 도시에 빛이 살아났다. 알록달록 예쁘게.
우리는 커다란 우산 하나에 어깨를 맞댄 채 시장에 들렀다. 싱싱한 수박과 잘 익은 토마토를 고르고, 저녁 식탁에 올릴 김치와 물김치, 몇 가지 반찬을 샀다. 검은 비닐봉지를 나눠 든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에 젖은 내 어깨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열정적이지 않으면 좀 어떠랴. 대단한 낭만이 아니면 또 어떠랴. 빗물 섞인 웃음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고, 돌아오는 길 손에 든 수박 한 통의 무게에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내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근사한 삶인 것을.
비가 내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