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술램프와 담뱃값
‘아, 지긋지긋한 하루가 또 시작되는군.’
희뿌연 새벽빛이 창틀을 스며 넘는다.
벽시계 초침은 마룻바닥 위로 가느다란 그림자를 그었다 지운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그는 안다.
여섯 시 사십오 분.
알람보다 먼저 떠지는 눈, 같은 시간, 같은 어조의 한숨.
그에게 아침은 늘 “다시”였다.
한 번 닫은 문을 또 열어야 하는,
이미 지나간 하루의 복사본 같은 시작.
세면대의 찬물이 눈꺼풀을 두 번 적신다.
면도날이 수염의 검은 가시를 벼 베듯 쓸고 지나간다.
거울 속 얼굴은 늘 똑같다.
피곤이 얇게 눌어붙어 표정이 잘 지워지지 않는 얼굴.
비누거품을 턱에서 닦아내며 그는 속으로 또 중얼거린다.
‘이놈의 회사는 사람을 언제까지 만년 과장으로 묶어둘 건가.’
욕실 문을 닫으며 다시 한번.
‘아, 지긋지긋해.’
아침은 건너뛴다.
TV에서는 아침밥의 중요성을 떠든다.
혈당, 집중력, 면역력… 온갖 ‘력’들이 자막처럼 흘러가지만,
그의 걸음은 식탁을 비껴 현관으로 간다.
식탁 위엔 떠놓고 식은 밥.
설거지 그릇은 쌓인 채, 접시 사이사이로 물웅덩이가 얇게 고여 있다.
“당신, 밥은?”
안방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이불속으로 반쯤 묻혀 나온다.
“괜찮아. 시간 없어.”
“어제도 안 먹었잖아.”
“먹으면 체해. 늦었어.”
구겨진 구두코를 손으로 한번 문지르며 그는 신발을 꿰어 신고,
아내가 다시 이불속으로 사라지는 기척을 뒤로한 채 문을 닫는다.
문틈 사이로 집 안의 어둠이 한 조각 새어 나온다.
그 어둠이 자신을 따라붙는 것만 같아,
계단을 더 빠르게 내려간다.
복도 조명은 오래돼 떨고 있다.
라면 박스와 누렇게 변한 택배 송장이 가구처럼 놓여 있다.
엘리베이터를 누르자 붉은 숫자가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느리게 내려온다.
문이 열리면 이미 두 사람.
속으로 그는 또 불평한다.
‘사람 참 많다. 비좁아 죽겠네.’
지하 주차장은 젖은 철 냄새가 난다.
차 문을 열자 냉기가 그를 한번 훑고 지나간다.
라디오에서는
“오늘은 화창한 날씨!”라며 들뜬 목소리가 쏟아진다.
정체 구간 안내가 나오자 그는 라디오를 꺼버린다.
‘정체는 늘 정체지, 뭘 매일 소식처럼 전하나.’
골목을 빠져나갈 때,
담장 밑의 개나리가 노랗게 피었다.
하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한다.
그의 머릿속엔
‘주차비 또 올랐나’
그 생각뿐이다.
건물 앞에서 모퉁이를 지키고 있던 노인이 손을 내밀며 말한다.
“이보게, 젊은이. 천 원만 주게. 배가 고파서…”
그는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다.
“야박하긴! 빵 한 조각만 사 먹게, 딱 천 원이면 돼!”
어깨를 움츠리며 그는 말한다.
“저도 돈 없어요. 주머니에 2,500원뿐입니다. 담뱃값이에요.”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값에 쓰지 말고, 늙은이 한번 구제해 봐.”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말한다.
“담배 없으면 불안해서요. 정말요.”
“그럼 이거랑 바꿔가.”
노인은 낡은 가방에서 반들반들 윤나는 주전자 하나를 꺼낸다.
손잡이는 구불구불하고,
주둥이는 길쭉하게 위로 들린 오래된 물건.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뜬다.
말도 안 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그 허무맹랑함이 마음에 걸렸다.
‘밑져야 본전이지.’
천 원 두 장, 오백 원짜리 하나를 꺼내 건네고
주전자를 손에 받는다.
금속 표면이 그의 체온을 천천히 받아 적신다.
빛이 손금 사이로 조용히 스며드는 느낌.
회사 앞 도로는 토요일이라 한산하다.
신호등 앞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선다.
각자의 가슴에 저마다의 불평을 하나씩 품은 채.
사무실 냄새가 그를 감싼다.
종이, 오래된 카펫, 전자기기 열, 커피 얼룩…
책상 위엔 서류 더미가 작은 성처럼 쌓여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옆자리 ‘감사씨’가 활짝 웃으며 커피를 건넨다.
그는 어정쩡하게 미소를 짓고 커피를 받는다.
방금까지의 어둠과는 정반대의 밝음이 흘러 들어온다.
그는 그 밝음이 오히려 불편하다.
주전자는 책상 아래로 넣었다가,
다시 꺼내 책상 위로 올린다.
형광등 불빛이 표면을 타고 은근하게 움직인다.
‘설마…’
그는 소매로 주전자를 슬쩍 문지른다.
아무 일도 없다.
‘내가 미쳤지.’
그는 모니터를 켠다.
어제 저장해 둔 엑셀 파일이 체스판처럼 떠오른다.
자판을 두드리려는 순간—
발밑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절대적인 힘이 올라온다.
바닥이 그의 몸을 잡아당긴다.
허리와 어깨가 고무 찰흙처럼 비틀리고,
시야의 상하좌우가 동시에 좁아진다.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이 달라붙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어둠이, 입처럼 벌어진 세계의 주둥이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