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씨의 하루 2

감사, 그 영혼을 울리는 행위

by 하이진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었다.


밤의 어둠과는 달랐다. 밤에는 적어도 밤의 냄새가 있고, 눈이 적응하며 작은 빛이라도 찾기 마련이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은 색이 아니라 물질이었다.
목을 조르는 천처럼 숨통을 죄어오고, 젤리처럼 끈적했다.
움직일수록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조여들었다.


그는 허벅지를 꼬집었다. 통증이 또렷했다.
꿈이 아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 허파 속으로 어둠이 함께 들어오는 것 같았다.
혀끝에서 철맛이 났다.


‘장님이 된 건가?’
그는 손을 눈썹 위로 올려봤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건,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누구 없어요!”


그의 목소리가 어둠에 부서졌다.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없었다.


소리도 길을 잃고 흩어지는 곳.
그는 욕설을 줄줄 끌어왔다. 감정보다 말이 빨랐다. 문장은 금이 가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어둠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입술은 마르고, 혀는 두꺼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어둠이 더 운신을 좁혀 왔다.


⌜– 오늘 새로 들어온 자는 어떤가?
– 처음엔 멍하더니, 지금은 욕을 퍼붓고 있습니다. 곧 울겠지요.
– 개입하랴?
– 벌써요?⌟


그는 지쳐버렸다.
바닥인지 허공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다리가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하지 못했다.
무릎 아래가 존재한다면, 이미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있을 터였다.


어둠 속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혹은 너무 빨리 흘러서 감지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호흡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심장은 뛰고 있는가?
귀에 들리는 건, 자신의 몸이 어둠과 비벼지는 소리뿐이었다.


살아야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한 걸음.
발끝이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두 걸음. 세 걸음.
어쩌면 천 걸음을 내디뎠는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외웠던 구구단이 입술에서 마른 잎처럼 바스러졌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지팡이라도 있으면…”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목이 더 말라 들어갈까 두려워 웃음도 삼켰다.


⌜– 이제 개입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래. 들어가 보자.⌟


어둠이 가볍게 떨리는 듯했다.
그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정확히 어디를 보는지도 모르면서.


그때였다.


누가 스위치를 켠 것도 아닌데, 한꺼번에—
부풀어 오른 목소리처럼—
세상이 ‘퍽’ 하고 뒤집혔다.


어둠이 물러나자마자, 이번엔 온통 하얀 세계가 그를 삼켰다.


흰색은 색이 아니라 빛이었다.
빛은 금속처럼 차갑고, 설탕처럼 매끄럽고, 눈처럼 뜨겁기도 했다.


그는 두 눈을 가렸다.
그러나 손바닥을 통해서도 흰색이 스며들었다.


오직 자기만 색을 소유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피부의 미묘한 황토색, 회색 바지, 검은 구두.
그 모든 것이 흰 세계에서 도드라졌다.


‘보인다.’

그 하나만으로도 기쁨이 밀려왔다.


멀리서 점 하나가 생겼다.
점은 점이 아니었다. 가까워질수록 형태를 갖췄다.


사람.
백발의 여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백의 옷.
피부는 거의 반투명했다.


그녀가 가까워오자 작은 테이블이 솟듯 생겼다.
레몬 슬라이스가 둥둥 떠 있는 투명한 음료.
얼음이 유리컵 안에서 천천히 서로를 부딪쳤다.
의자 두 개도 동시에 솟았다.


“앉아요.” 여인이 말했다.
“갈증이 심하겠군요.”


그는 엉거주춤 앉아 유리컵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어둠이 남긴 가루들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죠?”

“당신이 만든 곳.”


여인은 레몬 조각을 손가락으로 떠올리며 말했다.


“어제오늘, 앞으로도—당신 마음이 만든 장소.”

“난 납치됐어. 주전자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고.”


그는 컵을 비웠다. 얼음이 짤랑거렸다.


“그래요. 당신이 믿고 싶은 방식.

문지르면 뭔가 나올 거라 믿는 기대. 그러나 늘 빠져드는 건 당신 자신이지요.”


그녀의 미소는 친절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무심했다.


“당신은 누구죠? 내가 당신을 알아요?”

“오늘 아침, 나에게 2천 원을 줬지요.”


그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그건… 지저분한 할머니였어요.”

“당신이 날 그렇게 본 것뿐.”


여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때도 지금 모습이었어요. 사람들은 자기 안의 렌즈로 남을 보니까.”


그는 말을 잃었다.
손바닥에는 레몬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 향은 선명했지만 기분을 나쁘게 하진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 여름날 처음 먹었던 레몬사탕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은 늘 불평으로 하루를 살아가요.” 여인이 말했다.
“아침의 빛도, 길가의 꽃도, 당신에겐 귀찮음을 덮는 얇은 종잇장일 뿐이죠.”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요.”


그는 흰 세계를 둘러봤다. 그림자가 없었다.


“좋은 일도 없는데 바보처럼 웃을 순 없잖아요.”

“겉은 평범해 보여도, 당신 안은 이미 무너져 있어요.”


여인의 목소리는 의사처럼 차분했다.


“괴로운 일이 없어도 마음이 곪으면 매 순간을 불행이라 부르지요.”

“나가는 문은 어디죠.”

“문은… 당신이 찾는 겁니다.”


여인은 일어섰다.


“누구도 당신을 가두지 않았어요.”


그녀는 종이처럼 접혀 흩어졌다.
흰색이 부풀었다가 ‘쓱’ 하고 벗겨지듯 사라졌다.

그러자 세계가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모래.

시야 가득 모래뿐.
태양은 금속을 녹이는 화덕처럼 타올랐다.


모래알이 입술에 달라붙고 유리처럼 삭삭 갈렸다.
발아래 모래가 뜨겁게 밀려났다.


‘오아시스…’


그는 그 단어 하나를 붙들고 걷기 시작했다.

모래 언덕을 오르고, 내려갔다.


침이 마르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태양이 움직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은 판단력을 잃었다.

결국 그는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모래는 살갗에 화상을 남길 만큼 뜨거웠다.

그때, 오래전 장면들이 쏟아지듯 떠올랐다.


어머니의 이불 냄새, 콩나물국의 투명한 끓는 소리.
난로가 타오르던 겨울 교실, 종 치자마자 달려 나간 차가운 공기.
산 위 MT에서 먹었던 김밥 한입.
첫 키스, 기울어지던 밤, 결혼식장의 하얀 꽃.
새끼발가락이 쓸리던 새 구두.
아기의 첫 옹알이, 젖병, 체온, “아빠”라는 첫소리.

'나는 늘 불평만 했지만… 사실은 선물뿐이었구나.’


늦게 도착한 깨달음이었다.


⌜– 사람은 대개 마지막 물 한 모금 직전에야 깨닫는다.
– 왜 자꾸 감사하라고 합니까?
– 불평보다 나으니까. 감사는 말이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행위니까.⌟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비는 아니었다.

물컵 가장자를 타고 흘러내리는 시원하고 맑은 감각이었다.

모래의 열기가 순간 거품처럼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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