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그 다양함에 대하여

어린 여자와 첫사랑

by 하이진

어린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자신이 처음으로 사랑이라 믿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가 다니던 시골 학교에는 선생님보다 학생이 더 빨리 사라지는 이상한 구조가 있었다.
새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고, 가만히 있으면 친구의 졸업이 아니라 ‘이동’을 통해 빈자리가 생기던 곳.


그곳에, 기적처럼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훈남 국어 선생님.


수업 시간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어주곤 했다.
그 목소리는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의 마음을 몽땅 휘어잡았다.
어린 여자의 첫사랑이었다.


손 편지를 쓰고, 들꽃을 꺾어 건네고,
그 시절의 사랑은
늘 무모했고, 찬란했으며, 조금 우스웠다.


그녀는 그 마음을
어느 늦겨울 해 질 녘, 계단 아래에서
처참히 깨달았다.


"안돼. 지금 학교니까.”


달콤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진짜… 사랑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들꽃을 엮어 만든 다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요란했다.
곧 선생님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연인이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다.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쪽이 맞았는데.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더 이상 김소월의 시는 달콤하지 않았다.
그렇게 첫사랑은 끝이 났다.
혼자만의 이별이었다.


<현재 — 다시 두 여자>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이번에는 어린 여자가 물었다.
테이블 위에서 얼음이 부딪히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


따분한 표정의 여자는
아이스티 빨대를 천천히 돌려놓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없어요. 난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들으면 돼요.”


아무 감정이 없다는 말 같기도,
피곤하니 본론이나 말하라는 뜻 같기도 했다.


어린 여자는 순간 당황했다.
저 여자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연인이 된 남자를 대신해
이별을 통보하러 나온 자리였다.


이 멍청함은 뭐지.


상대에게 원망도, 분노도 없다면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녀는 대본을 잃어버린 배우처럼 말문이 막혀버렸다.


“제가… 그 사람과 만난 건—”


“이별의 구질함까지 짊어질 만큼 사랑한다는데, 내가 못 이기죠.”


따분한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정리 잘했다고 전해요.”


정리.

어린 여자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 남자를 가진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쓰레기를 넘겨받은 기분이었다.


“전… 죄송한데—”


“죄송할 것 없어요.”


따분한 여자가 말했다.


“그 사람이 악역을 자처하기엔 너무 연약하죠?”


어린 여자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요?”


따분한 여자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창밖으로 사라지는 버스 한 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처음이 아니니까요.”


“……네?”


“이런 방식의 이별, 이런 종류의 사람들. 처음이 아니에요. 그리고…”


잠시 말을 삼킨 뒤, 덧붙였다.


“…그 사람을 잃는 게 생각만큼 큰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까.”


그 말은 어린 여자의 심장을 묘하게 건드렸다.


“그래도… 사랑했잖아요.”


조심스레 묻자,
따분한 여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너무 오래된 이야기예요.”


두 사람 중,
진짜 사랑을 잃은 사람은 누구일까.


갑자기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맺힌 유리잔이
석양을 받아 조용히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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