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한 여자와 어린 여자
빌딩 사이로 가물가물 저녁 시간이 스며들고 있었다.
여름 태양은 여전히 땅을 후끈하게 달궈대며 쉽게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따분한 표정의 여자는 괜히 딴청을 피우듯 도로 쪽을 바라보았다.
정면에 마주 앉은 상대를 똑바로 보는 건,
지금 상황에선 굳이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었다.
사실 이 자리가 처음도 아니었다.
애인, 혹은 애인이었던 사람의 새로운 연인을 마주 앉히는 일.
모양만 조금 다를 뿐, 결국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맞은편의 여자를 스캔하는 일은 잊지 않았다.
만져보면 말랑할 것 같은 젖살, 웃을 때 패이는 왼쪽 보조개,
수술 티가 거의 나지 않는 쌍꺼풀, 길게 늘어진 생머리.
평범했다.
단지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리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다섯 살’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녀에게도 다섯 해의 경험이 있었지만,
저 아이가 가진 백지수표 같은 가능성 앞에서는
그 경험이 머쓱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어린 여자는 조금 미안해하는 듯하면서도,
당당했다.
백지수표의 주인은 흔들림이 없다.
한편, 따분한 표정의 여자는
맞은편에 누가 앉아 있는지 조차 잠 잊은 듯
아주 오래된 겨울의 기억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16살이었다.
찬바람이 씽씽 불던 버스정류장.
볼이 붉게 달아오른 소녀는 긴장으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원래 말더듬이는 아니었다. 그저 너무 떨렸을 뿐.
소녀는 용기를 쥐어짜며 말했다.
“… 말을 하지 그랬어.”
소년의 표정에는 어리둥절함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무슨 말이니?”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비밀을 꺼냈다.
“날 좋아한다는 말… 선영이한테 들었어.”
그 말은 작은 축복이 되기를 바랐지만,
소년의 표정은 순간 멈춰버렸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소녀는 모든 걸 이해했다.
절친이라 믿었던 친구의 장난.
그 장난이 무참히 짓이긴 마음.
만약 그때 소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면
장난은 우연한 사랑의 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6살의 소녀는 부끄러움과 배신감에 타올라
우정과 짝사랑을 동시에 잃었다.
그 후로 12년이 지나서야
그 사건은 조금은 하찮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그 소녀에게 그것은 첫 번째 이별이었다.
다시, 지금.
복숭아 아이스티와 얼음 가득한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따분한 표정의 여자는 힐끗 상대를 바라봤다.
어린 여자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정실부인 앞에 선 첩실처럼,
그러면서도 긴장과 당당함이 섞인 얼굴이었다.
이별을 통보하러 나온 사람의 표정치고는 어딘가 서툴렀다.
애인의 마음이 흔들려 자신에게 넘어오는 동안
그 화학작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
어린 여자는 순간,
이별이란 게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하고 생각했다.
따귀 한 대쯤은 예상했는데.
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찝찝함은 뭘까.
잔변이 남은 것 같은 뒷맛.
어린 여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덤덤하게 이별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 생각 끝에서, 그녀 역시
처음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