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 허블

by 하이진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못 배웠다. 비위를 맞추거나 변명하는 것만이 내가 배운 삶의 방법인데, 옷장 밖의 세상에선 저런 말들보다 고맙다는 말을 놓치지 않고 내뱉는 것이 더 중요했다.]


첫인상은 ‘음-’이었다.
중반을 넘어서자 ‘아-’가 되었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이야기는 떠난 자와 남겨진 자, 그리고 인류가 사라진 뒤의 지구를 다룬다.


처음엔 솔직히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아버지를 밀어 죽였다는 고백이 나왔을 때는 범죄 이야기인가 싶었고,
주인공의 상태를 보며 정신질환 서사인가 잠시 의심했다.
그러다 연도가 2109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 SF구나 싶었는데, 이번엔 아동 폭력이 등장했다.

장르를 짐작하려다 포기하게 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정타처럼 좀비가 등장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르였다.


읽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게 아까워서 계속 읽었다.
추리는 엉성했지만, 어쨌든 페이지는 넘어갔다.


모든 폭력은 잔인하지만, 보호자로부터 받는 폭력은 특히 그렇다.
달아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옷장 안에 숨은 옥주,
천장과 옷장 사이의 틈에 몸을 구겨 넣은 묵호.


삶의 따뜻함을 붕어빵 아저씨에게서 처음 배운 아이들.
그 붕어빵 아저씨가 엄마나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마음.

쥐구멍에 드는 볕만큼의 온기였을지라도,
그 아이들 곁에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결국 서로를 찾아냈다는 점이 기특했다.


이 책에서 좀비는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추억을 잃는 것이고,
사랑을 잃는 것이며,
고독해지는 인간의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살리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설정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서로에게 유일했던 두 사람의 마음은
삶과 죽음 앞에서도 유효할까.
지구를 떠나지 못한 남겨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돌볼까.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지구는, 어쨌든, 돈다.
여전히.


난 알지만 스포라 그만 입 다물게요^^

매거진의 이전글달과 6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