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2장

단노우라 전투의 처절한 푸가

by 하이진

“나는 지금까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왔던 모든 유기 생물들이 단 하나의 어떤 원시 생물에서 유래했다고 거의 확신한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찰스 다윈을 읽은 건 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아마 창조설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다윈의 오류라도 찾아보고 싶었던 걸까. 그 패기만큼은 참 대단했다.


기억에 남는 건 그의 편집증적인 관찰력, 끝없는 분류, 그리고 진화라는 개념 하나에 달라붙어 평생 놓지 않던 집념의 열기였다. 읽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는데, 그는 그 느린 확인 과정과 세세한 기록을 묵묵히 반복했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은 내용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딱 한 줄짜리 결론만 남았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그 이후로 나는 종교를 포함해, 거의 모든 일에 대해 단정 짓기를 그만두게 됐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제야 조금 따르게 된 셈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상하게, 다윈의 ‘광기’만큼은 좋아하게 됐다. 나에게는 없는 에너지라서 그런지, 그런 광기가 비치는 사람에게 괜히 호감이 간다. 물론, 먼발치에서만.


그렇게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내 관심은 자꾸 다른 곳으로 흘렀다.
예를 들어, 단노우라 전투의 마지막 장면 같은 곳으로.


일곱 살 꼬마 안토쿠와 할머니 니이.

패색이 짙어지는 바다 위에서 아이의 긴 머리카락을 묶어주던 그 손은 떨리고 있었을까.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나요?”
“우리의 황도는 바다 저 깊은 곳에 있습니다.”


헤이케 일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책 속의 '헤이케 게' 사진을 보고 정말 놀랐다. 등딱지에 새겨진 사무라이 얼굴, 자연선택인지, 인간의 선택인지 모호한 그 경계. 어부들이 무의식적으로 사무라이 얼굴을 닮은 게 들을 바다로 돌려보내며, 결국 죽은 자들의 얼굴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기묘한 '푸가'가 아닐까.


지금은 환경오염이나 방사능을 떠올리며 찝찝해서 안 먹었을 것 같은데, 그 시대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먹고 싶지 않은 외형이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나무 그늘이 사실은 치열한 생존 경쟁의 매 순간이라는 대목도 꽤 오래 남았다.

햇빛을 ‘나른한 은총’이라고 표현한 문장도 좋았다.

하지만 모두가 받고 있는 *나른한 은총*은 점점 *뜨거운 은총*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이 또 다른 곳으로 튄다.
우리가 카인의 후손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그 묘한 불쾌함과 낯섦 같은 것들.

진화와 생존은 늘 무언가를 파괴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걸까.
약한 것은 곧 불완전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완전한데, 불완전한 존재들이 또 다른 불완전함을 밀어내며 경쟁하는 게 과연 옳은 방향일까.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고, 좋은 특성만 골라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시대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건 과연 ‘완전한 인간’일까.
아니면 정교하게 제조된 사약일까.

사약을 만드는 약초들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다 귀한 약초라는데,

귀한 것에 귀한 것만 더한다고 해서 반드시 최고로 귀한 것이 될까?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틀린 것.

산소와 이산화탄소,
인간의 호흡과 나무의 호흡.

결국 함께 얽혀서 존재하는 것들.


타자를 이해하려 애쓰다가, 오히려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문장.

대체 이해해야 하나? 꼭?


그래도, 지구의 모든 생명을 ‘푸가’라는 단어로 표현한 칼 세이건의 낭만이 좋았다.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결국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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