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man(한 인간)에 대해 쓰라.
-E.B. 화이트
은유. 《쓰기의 말들》. 필사 92. P205.
주일 아침이다. 교회까지 30분 거리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아내와 맞지 않아 차는 아내에게 양보한다. 햇볕이 따가웠다. 나무그늘, 건물 그늘 사이로만 걸었다. 땡볕이 나올 때면 빨리 걸었다. 새로 산 구두가 발뒤꿈치 살을 벗겨 따가웠다. 차가 빵빵거리며 지나간다. 오토바이도 쌩하니 내 옆을 지나갔다.
가슴골 사이로 땀이 흘러 배꼽으로 연신 흘렀다. 이마에 땀을 몇 번 닦았다. '왜 꼭 차를 아내에게 양보해야만 하지.', '택시를 타고 올걸' 골목 오르막길을 오르다. 숨이 턱 막혀 잠시 쉬었다. 스멀스멀 성질이 올라온다. 마치 시원한 바람이 한바탕 몰아와 가슴팍으로 스며들었다. 기분이 한 결 나아졌다.
예배를 마쳤다. 선교회장이 점심시간 식당 봉사를 부탁했다. 눈빛이 애원하는 눈빛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표정. 식당으로 가서 가운을 갈아입었다. 임무는 식판을 들고 경로석 성도들에게 밥을 나르고 식사 마치고 나면 빈 그릇을 수거 주방으로 옮기는 일이다.
예배를 마치자 교회 식당으로 한 사람씩 들어왔다. 굽혀진 허리, 걸음걸이는 뒤뚱뒤뚱, 고개는 잘래잘래, 지팡이를 짚는 등 한결같이 거동이 불편하다. 머리카락은 단체로 흰색으로 염색한 듯했다.
식판을 들고 가자 먼저 달라고 손을 든다. 손을 높이 들고 소리치는 분도 있다. 마음은 먼저 드리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순서대로. 어느새 식당 안에 빈자리가 없이 빼곡했다.
이제, 식사한 빈 그릇을 주방으로 옮기는 작업이다. 빈 그릇을 수거해서 잔밥통에 잔반과 반찬을 버리고 식기 세척하는 분들에게 인계했다. 잔반만 있으면 편한 데 휴지 등 이물질이 있으면 쓰레기통에 버려야 해니 번거로웠다. 식당에서 휴지를 잔뜩 쓰고 식판에 두면 아내가 나무라던 말이 떠올랐다. 빈 그릇을 가지러 갈 때면 잘 먹었다고 환하게 웃는다. "아이고 집사님, 고생 많데이~ 수고한데이, 잘 먹었다 고마워~" 어린애같이 귀여워(?) 보였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고 막 기분이 좋아졌다. 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식당들을 마무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부재중 전화 3통이나 와 있다. '식당 봉사한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웬일이지 싶어 전화를 했다. 마트에 시장 보고 있는 데 무겁고 덥고 미치겠단다. 식당에 나를 찾아왔었는데 없었다고. 짜증이 묻어 있는 목소리다. 주방이 아니라 홀에 있었는데 주방에만 보고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좋았던 기분이 확 달아났다. 아내 마음도 이해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차 안에서 집으로 가는 길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밴댕이)
한증막 같은 집안 분위기. "여보, 새로 나온 영화 있다 하던데 보러 갈래?" 아내 눈치를 슬슬 살폈다.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 10층. 팝콘을 샀다. 팝콘을 입에 쑤셔 넣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춥다. 긴 옷을 입고 올걸!. 라클 라이너 의자에 누웠다. 집같이 편했다. 팝콘 통에 손이 부딪혔다. 먼저 가져가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내에게 물통을 건넸다. 갑자기 아내가 말이 많아졌다. 영화 임윤아 주연 '악마가 이사 왔다'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보, 소고기 사 왔는데 구워 먹을래?" 또 하루가 스쳐 지나간다.
36년을 같이 살아도 아내를 모르겠다. 평생 살고 있는 나도 잘 모른다. 한 사람을 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마음도 수시로 바뀐다. 더위에 짜증 났다가. 예배 때는 성자처럼 변신한다. 식당 봉사할 때 기뻤다가 아내 한마디에 기분이 팍 상했다가 팝콘 한 통과 영화에 기분 좋아진다. 짧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덕스러운 좀생이 같은 이 마음. 어쩌면 좋을까? 환갑이 지나면 철이 든다는 데 아직 한참 멀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듯, 오늘 하루도 그랬다. 땀 흘리며 걸었던 아침 길, 짜증 났던 순간들, 어르신들의 환한 웃음, 아내와의 실랑이, 영화관에서의 달콤한 화해.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그렇게 쌓여 한 인생이 된다. 밋밋하면 재미없다. 지지고 볶고 울고 웃어야 제맛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 우리는 배우인 셈이다. 오늘도 나는 한 편의 드라마를 연기하며 살았다. 영화를 보며 또 인생을 배운다.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럽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하루. 그 하루를 오늘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