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글 Nov 18. 2024

당신의 기다림이 꽃 피는 날까지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하려는 세상입니다. 아침을 서둘러 먹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며 이메일을 확인하고 회의 일정을 점검하며, 환승하기 위해 뜁니다. 다음 차를 놓치면 지각입니다. 겨우 탔습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먹는 음식까지 패스트푸드(fast food)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저승길도 빨리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느리게 가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느린 사람을 보면 인간성이 있어 보입니다.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빠른 속도에 중독된 우리의 일상에서, 느림은 치유이자 회복입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순리에 따라 몸을 맡기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성경 창세기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있습니다.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는데, 아브라함 나이 75세 때, 하나님이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아브라함에게 예언(언약)을 합니다. 후손이 모래알같이 많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라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가 없자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급기야 몸종 하갈을 통해서 아이를 낳자고 아브라함에게 권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언약을 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미안했던 것이지요. 


결국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자 몸종 하갈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아이 못 낳는 아내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종을 통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13살 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겼을 것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다른 지방으로 동행할 때, 사라를 아내라 소개하지 않고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참 어이가 없지요. 그럼에도 아이 못 낳은 미안함에 말 한마디 못합니다. 사라는 자기를 남편이 누이로 소개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두 번이나 남의 아내가 될 뻔했습니다. 그래도 참고 견디었지요. 


사라는 오래전에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아이를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지요. 그럼에도 무려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 100세 되던 해 마침내 사라가 아들이삭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기가 되어, 언약(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느리게 이루어진 결실이기에 사라의 기쁨의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응어리가 말끔히 씻겼지요. 인생의 꽃이 피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지 35년. 우리도 다른 부부처럼 새로운 삶을 꿈꾸며 많은 약속을 했었지요. 아이도 갖고, 예쁜 정원이 있는 집도 장만하고, 둘이서 세계 여행도 다니자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지요. 낮에는 맞벌이로 치열하게  회사일에 매달렸습니다. 육아 때문에 탁아방을 전전했습니다. 신혼의 달콤한 꿈을 보낼 시간도 없었지요. 나는 늘 술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앞만 보고 살았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던 아내는 꿈을 뒤로 미루어야 했지요. 


힘든 가운데서도 아내는 늘 나를 챙겼습니다. 연탄불에 들통을 올려 물을 데워두었다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내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회사에서나 모임에서나 늘 남편인 나를 자랑했습니다. 


 아내는 옷을 싸구려만 사 입었어요. 시장통에 있는 옷도 자기에게 잘 어울린다면서. 하지만 내가 옷을 살 때면 늘 롯데 백화점에 데리고 갔습니다. 메이커 있는 양복을 사 주었지요. '당신은 체구가 작아 백화점 옷 아니면 안 어울린다면서. 내 옷 한 벌이면 아내 옷 10벌은 살 수 있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아내 옷을 사라고 이야기하면 손사래를 쳤습니다. 억지로 팔을 끌고 마음에 드는 옷 고르라고 하면 백화점 몇 바퀴를 둘러보고서는 가격이 제일 쌀 것 같은 옷을 골라 가격표를 보고서는 얼른 내 소매를 잡아당겨 백화점을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7시. 부산큰솔나비 독서포럼이 있는 날. 행운권 추첨 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웬걸, 제가 당첨되어 화장품을 받게 되었지요. 독서모임 처음 오신 분에게 드린다고 공표했습니다. 저 뒤쪽에서 아내 지원이를 주라는 회원 이야기가 들렸지만 모른 체했습니다. 화장품은 총 3개, 마지막 번에 당첨된 M 선배가 화장품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독서모임 선배와 카페 가는 차 안에서 행운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평소에도 알았지만 당신은 내 생각을 절대 안 하는 것 같아" 0.1초 망설임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행운권을 주더라며 서운해했습니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이번 확실히 알게 되었다나...... 동승했던 독서 회원도 거들었습니다. 


물론 화장품을 새로 오신 분에게 줘야 한다는 것에 딴지 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아내에 대한 내 마음 문제라는 것이지요. 여러 핑곗거리를 대려고 머리를 굴렸습니다. 궁색한 변명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내 마음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사라는 25년을 기다려 아들이삭을 낳았습니다. 천천히 참고 기다리다가 얻은 아들은 무엇보다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기다림 속에 피는 꽃은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아내는 나를 만나 숨 쉬는 것조차 아껴가며 바쁘게 달여왔습니다. 무려 35년을! 아직 인생의 꽃 피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입니다. 




자정이 지나고 있습니다. 아이패드를 켜 두고 아내가 반쯤 입을 벌리고 자고 있네요. 아내 얼굴을 내려다봤습니다. 신혼 때 복사꽃 같던 얼굴 위로 깊은 한숨 몇 개, 지친 마음 몇 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애먹이는 내 모습 여러 개, 꽃 피는 날을 기다리는 그리움 몇 개가 스며있는 것 같습니다. 


중한 게 뭔지? 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면 와도 되었는데, 손잡고 주위를 둘러보며 와도 되었는데, 좋은 곳에 가서 밥도 먹고, 여행도 자주 가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며 살아도 되었는데......


큰 지우개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아내 얼굴에 그림자를 하나씩 지워가야겠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아내 얼굴에 복사꽃이 피는 날까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원칙 하나, 구체적으로 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