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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Jan 19. 2020

직장 술자리에서 상처받았을 때의 대처법

만만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니가 짜증 나서 나한테 화낸 거잖아! 아니야? 니가 나를 만만하게 보고 그런 거잖아!


5월 기분 좋은 저녁, 2차로 간 작은 치맥 집에서 작은 테이블 너머로 나에게 삿대질하며 치킨이 바닥에 구르도록 분노를 폭발시키는 A를 처음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곧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술자리에서 상처받거나 화가 났다면>


어느 직장이나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성인의 탈을 쓴 사춘기 직장인. 상처받은 어린이를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화를 폭발하며 남에게 상처 주는 사람.

나는 운이 좋아 자라면서도, 직장 생활에서도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다. A를 만나기 전까지는.


직장 회식자리, 특히 술자리에서 술의 힘을 빌어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취한 척 자신을 무섭게 가장하여 화를 내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았는가? 화가 났는가?


나는 이제 답을 안다.


반드시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당사자에게 가야 한다.

그리고 어제 왜 나에게 그렇게 했는지 물어야 한다.

감정을 싣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사실만 말한다.

당신의 이러저러한 행동으로 나는 어제 충격을 받았으며(상처를 받았으며, 화가 났으며) 이 일에 대해 사과받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

운 좋게 사과를 한다면 다행이지만 만일 술에 취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발뺌을 한다면 다짐을 받아야 한다.

사과를 하든 하지 않든 나는 상급자에게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대응을 할 것이라고(경찰을 부르든,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를 하든) 해야 한다.


나는 바보처럼 저렇게 하지 않았다. 그 후유증은 강하고도 오래갔다.



<내가 만만해 보였나?>


첫 부장을 맡아 나름 애를 쓰며 부를 운영하고 있었고, A는 나보다 5살 이상 어렸다. 교실에서도 교무실에서도 분위기 메이커이고 쾌활하며 학생들이 잘 따랐다. 자기 과목의 전문성이 뛰어나고 행정업무도 잘했다. 흑백 논리를 잘 펼치고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재미로 그러는 것이겠지 여겼다. 상대적으로 힘 있는 남교사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런 분들 앞에서는 아주 예의 발랐지만, 상대적으로 힘없는 교사들에게는 가끔 예의가 없었다. 소문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대상이 되는 여교사가 근무하는 실로 찾아가 "000 나와! ~~!"라는 식으로 바로 이름을 부르며 화를 낸다는 말도 있었지만 직접 보지 못해 설마 그런 일이 있겠나 생각했었다.


가끔 분노 조절을 잘 못하는 것인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실 내 복사용지 박스를 차거나 책상을 내려쳐서 여자 동료들이 불안해했다. 결국 한 달 뒤쯤부터는 그럴 때마다 내가 "A 선생님,  다들 깜짝깜짝 놀라니 그렇게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총대를 매어 말했다. 나는 그런 행동을 싫어하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었다. 그래도 내가 부장이니 다른 부원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분노 폭발이 조금 줄어드나 싶었다. 하루는 갑자기 뭔가 또 심기를 거슬렸는지 "에이 씨" 하며 박스를 찼다. 나도 화가 나서 세게 말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실 나는 직장에서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이다. 그러니 다들 놀랬을 것이다. 그 이후 A의 책상을 치거나 문을 꽝 닫는 등의 행동이 줄어들었다.


한 달쯤 지나서 진행하던 프로젝트 협의회를 할 일이 있었다. 1차는 저녁을 먹고 바로 회의를 했다. 회의를 잘 마쳐서 기분이 좋았다. 2차는 내가 내기로 했다. 일찍 가야 하는 사람은 빠지고 소수 인원이 갔다. A, 여선생님 2명, 나.


A는 맥주를 마시더니 분명 많이 취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삿대질을 하며 반말로 화를 냈다.


야! 그때 박스 찼을 때 니가 짜증 나서 나한테 화낸 거잖아! 아니야? 니가 나를 만만하게 보고 그런 거잖아! 왜 다른 데서 스트레스받고 와서 나한테 화를 내는데! 


어찌나 소리가 큰지 손님들이 다 쳐다봤다. 이런 일은 처음 당해보았다.


갑자기 부끄럽고 서러웠다.

(상담 후 알았다. 그때 내가 느껴야 했던 감정은 분노이다.)

"그럼 그때 말하지 그랬어! 난 눈치 없어서 말 않으면 잘 모른다고! 니가 차고 다녔잖아!"

겨우 이 정도 대거리를 했다. 울컥하면 말이 잘 안 나오는 편이다. 논리적으로 말도 할 수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말싸움 한 번 않고 조용히 지냈었다. 막 눈물이 나왔다. 동석한 여선생님들은 당황했으나 A를 말리기만 할 뿐 누굴 편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명은 어리고, 한 명은 같은 부서가 아니라 상황을 몰랐다.



<잘못된 대처 방법>


집에 와서도 너무 서러워서 남편을 붙들고 울었다. 남편은 엄청 화를 내며 다음날 출근하면 윗분들에게 얘기를 하라는 등 해결방법을 알려주려 했지만 나는 나이도 어린 부원에게 이런 일을 당해서 부끄러웠다. 내가 무능력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처음 부장을 해서 리더십도 부족하고 능력 없어 보일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었다.


다음 날 출근하니 A는 실에 있지 않았다. 당장 부서 내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찾아가 봐야 했다. 교과 연구실에 있다고 해서 갔다. A는 내 눈도 못 쳐다봤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의논할 일을 하고 실로 왔다. 며칠 후부터 그는 다시 실로 출근했고, 몇 개월이 흘렀다. 우리 부실은 늘 즐거웠고 꽤 시끌시끌하면서도 다른 부서의 부러움을 받았다. A는 자주 사다리 타기 등을 통해 커피 내기도 하고 술을 좋아하는 동료들과 신나게 지냈다. 조용한 사람들은 이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해 따르는 척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다.



<상처를 잘못 다루면 썩어 들어간다.>


나는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밤 사이 조용히 자는 결에 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었고 여름을 지나면서는 저녁에 베란다에 나가지 못했다. 뛰어내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학교를 간다는 게 너무 싫었다. 직장 출근이 좋아 출산 휴가도 다 쓰지 않고 복직한 나였건만.


부서의 조용한 다른 선생님 한 분과 연말 즈음 산책을 할 일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으셨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는 속을 털어놓았다. 아무에게도 못했던 그 얘기였다. 울음이 나왔다. 그분은 손을 꼭 잡아주시며 말했다.


"왜 일찍 말 않았어요. 저도 힘들었어요. 처음으로 퇴직까지 생각했어요. 실에서 저만 투명인간 같았어요. 선생님은 그들과 잘 어울리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이다 보니 힘들어하는 것이 티가 안 났던 모양이었다. 그 학년도 말,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관리자분들께서 갑자기 학교를 옮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하셨고 나는 상황을 간단히 말했다. 상처받아서 못 있겠다고.


나의 설명을 들으신 후의 반응을 보니 A가 원래 그렇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신 것 같았다. 그렇다면 A에게 조언을 해주실 거라 생각했지만 그분들은 나의 이동을 더 이상 말리지 않는 것으로 답을 주셨다.

두 번째 상처였다.

나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끝없는 우울감은 일상생활까지 위협했고, 이동했던 학교에서 업무 스트레스가 늘어나자 직장에서조차 감정 조절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보여줄 수 없었다. 2학기에 교원치유센터에 연락을 하니 상처받은 교원이 얼마나 많았던지 예산이 1학기에 다 떨어졌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생명의 전화는 시도할 때마다 통화를 실패하였다. 심각성을 깨닫고 2학기 시작 즈음 정신보건센터에 전화를 했다. 간단한 검사 후 병원을 가거나 상담을 꼭 받으라고 안내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모든 우울의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우리 가족이 불행하다고 느꼈으며, 그 이유도 나에게 있었다. 그 어떤 일도 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원인은 나였다. 나만 없어지면 모두 해결될 것 같았다. 이 우울감의 원인은 나였다. 나의 어떤 것이 원인인지, 혹시 고칠 수 있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못 고친다면 정말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유료 상담을 시작했다.



<치유의 시작-나는 화가 났어야 했다>


상담을 하는 동안 초반에는 성장기 경험이나 부모님의 양육 스타일 등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상담 몇 회기만에 아무런 맥락 없이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과 함께 그날의 술자리가 떠올랐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편하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날의 억울하고 부끄러웠던 심정을 토로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말씀하셨다.


그 일은 당신을 무시하고 예의 없이 행동한 그 사람의 잘못이지요. 화가 나셔야 하는 상황입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 왜 부끄러웠을까요?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겠네요.


갑자기 머릿속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나의 리더십이 문제이던, 능력이 없어 보였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상황은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반말로 나에게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A가 나에게 말한 내용은 학년실에서 둘이 있게 되었을 때 나에게 차분히 말해주어도 되는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분노조절장애 학생처럼 행동한 것은 그에게 뭔가 상처가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게 이해는 할 수 있으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대신 부끄럽거나 스스로에게 잘못을 찾은 것은 나 또한 상처받은 어린이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단단한 자존감을 갖고 있었다면 감정적으로 상처받기보다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대처했을 것이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이 우울감의 근원을 찾기 원하셨다. 그 사건 자체보다는 내가 자존감이 낮은 이유를 찾으려 하셨고 어느 정도 원인을 찾았다.


이후 여러 가지 일이 더 있었지만 이미 그 학교를 떠난 뒤 일이라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여간 그 일이 있은지 1년 반 만에 A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내가 생각한다면" 사과한다고 말했다. 내가 우울증이 와서 상담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자 "자신도 우울증이 있다"라고 했다. 나는 사과가 늦었다며, 당신은 "그때" 사과했었어야 한다고,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이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고 했다.(당시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 A가 연락을 해왔었다. 나는 지금도 A가 이 전화를 떠밀려서 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 사과할 생각이 없는 사과 전화가 왜 필요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몇 년이 지났다.

지금은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 우울감도 많이 줄어서 가족들을 품어줄 여유가 생겼고, 아들의 사춘기는 부드럽게 끝났다.

이제는 A에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상처받은 영혼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나이에 맞는 행동,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용서할 수 있다. 나도 성숙하지 못한 대처를 하였다"라고.


나는 소식에 둔감한 편이라 그 일 이후 어떤 일이 더 진행되었는지 잘 모른다. 아마도 A도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바뀌었을까? 바뀌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주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100% 상처 없이 지나는 해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나와 A성장해야 한다. 아마 나도 A에게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대처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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