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미국에서의 전업주부 적응기 2

40대 과학 교사, 불량 주부 – 30대, 불량 엄마

by 살다

미국 와서 주차장이 뒤에 있다는 간판을 많이 보았다.

-저런 “rear” 같은 자주 쓰는 중요한 단어는 학교에서 왜 가르치지 않나요? 처음 보는데요?

남편은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중학교 때 배우는 단어예요.

수능 영어를 모두 찍어 친 실력이 들통 났다.





<전업주부의 삶 - “00언니, 00엄마, 00야”>


전업주부로서 가장 신기했던 경험은 바로 호칭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들보다 약간 어린 딸이 있는 아주머니를 만났고,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았다. 우리는 같이 만나 놀지 않겠냐고 하고는 자연스레 친해졌다. 늘 “000선생님”이라고 호칭하다가 “00언니, 00엄마”라고 하니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다. 나중에는 이 호칭이 얼마나 친밀감을 주는지 깨달았다. 가족같은 느낌. 직장생활로 인해 직장 외 주부를 만날 일이 없다가 의지가 되고 뭔가를 묻고 서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생기니 좋았다. 전업주부들이 너무 부러웠다.


남편의 파견근무가 1년 늘어 3년을 그렇게 보내고 복직했을 때 어느 선배 선생님을 “언니”로 부르는 황당한 일도 있었지만 이 습관은 금방 사라졌다.



<전업주부의 삶-서로의 집에 놀러가기>


외동들은 대체로 심심해한다. 늘 놀아줘야 한다. 이 힘든 시기에 한국인 언니 2명을 알게 된 것이다. 서로의 집에 편하게 찾아가서 놀고 쉬었다. 아들은 잦은 양육 환경 변화로 예민하고 배려심이 없는 편이었으나 언니들은 그런 아들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었다. 지금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언니들도 나와 지낸 기억이 좋았고, 서로 도움을 받았다고 말해주니 더욱 감사했다. 그 중 한 분과는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 카톡을 한다.



<전업주부의 삶-학부모 되기>


지금에서야 애랑 같이 집에서 내내 놀아보는 것도 좋았겠다 싶지만, 당시에는 어린이집을 빨리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육아가 맞지 않아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너무 많이 주고 있다고 느꼈다. 화를 내고 나면 이게 정서적 학대구나 싶었다. 아이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절실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남 눈치를 보고 사는 성격이 문제였다. 패션, 살림은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데, 뭔가 모르는 것을 들키기는 싫었다. 2년을 살고서도 영어가 하나도 늘지 않을 것 같은 한인타운의 환경을 생각하니 복직 후 동료 선생님들이 뭐라고 생각하실지 걱정이 되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학창시절 영어를 꽤 하신 분들이라 회화는 안되더라도 어휘를 많이 아시기에 영어로 이런 저런 검색이 가능하시다. 나는 회화도, 어휘도 꽝이었다. 내가 영어를 배우러 가려면 애를 맡겨야 했다.


첫 해에는 어린이집을 보냈다. 애는 가기 싫어했지만 붙어있는 것은 아이에게 더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다. 워낙 말을 잘 하던 아이라 영어만 쓰는 곳은 힘들 것 같아 한인 어린이집에 보냈다. 잠을 잘 자지 않던 아이답게 낮잠 시간에 홀로 깨어있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다음 해 중반에는 LA 한인타운의 공립초등에 있는 Pre Kindergarten에 갔다. 이 시기에 아이와 나는 큰 성장을 했다. 아들은 12월생이라 생일이 늦어 같은 나이 애들이 Kinder를 갈 때 PreKinder를 가야 했다. 아침 8시 반에 가서 11시면 마쳤다. 한국 학생과 히스패닉 학생이 반반씩 있는 학교였고, 나이가 있으신 한국출신 여선생님(Mrs. Shon)께서 담임을 하셨다. Mrs. Shon 선생님은 풍부한 교직 경륜을 바탕으로 아이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셔서 나에게 조언을 해주셨다. 아이도 한국과 미국의 다른 점을 빨리 배울 수 있었고, 영어 습득이 빨라 따로 지도를 해주시기까지 했다(한국 가서는 연계에 실패하여 현재 영어 포함 평범한 중간권 학생이 되었다). 미국 공립학교는 부모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했는데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로 번역을 해가며 부모교육을 시켰다.


Pre-K를 마치면 사립 어린이집으로 데려갔다. 오후반에 맡긴 것이다. 당시 나는 어덜트 스쿨에서 ESL 수업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영어가 그다지 늘진 않았지만 지금도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애와 긴 시간을 보낸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나의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했고,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아침, 저녁, 주말에 아이에게 더 즐겁게 에너지를 쏟아줄 수 있었다. 아이는 나로부터 상처를 덜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이는 Pre-K를 졸업하고 Kinder에 입학했다. 6개월 미국 공립초등학교 경험이 생겼다. 역시 영어-한국어 이중언어 반이었고 나이가 있으신 한국출신 여선생님(Mrs. Park)이셨다. 정말 뛰어난 선생님이셨다. 아이는 학교에서의 행동과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빠른 속도로 습득하였고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일명 최순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최순실씨 얼굴이 너무 익숙해요. 전에 미국 있을 때 담임 선생님 최순실 닮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이미지가 많이 닮았었다. 미국 생활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아이가 선생님 얼굴은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했다. 교사로서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전업주부의 삶-궁상떨기>


미국 LA 생활, 3년을 줄여 말하면 한마디로 궁상이었다. 남들은 좋은 유모차 살 때 천 한 장으로 아이를 받치는 낡은 유모차가 생겼다(주웠는지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고무 발판은 곧 떨어졌고, 패션이나 살림으로 남 눈치 보지 않는 우리 부부는 이삿짐 쌀 때 쓴 노끈을 얼기설기 엮어 발판을 만들었다. 애는 이 유모차를 싫어하지 않았고, 나는 어디나 끌고 다녔다. 남편이 바쁘니 애랑 둘이서 장보러 가면 늘 끌고 갔다. 손잡이에 주렁주렁 짐을 매달고 집으로 왔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그런 행색으로 다닌 사람은 홈리스 말고는 없었으니 참 무신경하게 살았다.


옷은 이월상품을 전문으로 파는 가게에서 싸게 구입했다. 옷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사지 않고 한국에서 가져온 옷을 입었다. 식재료 쇼핑을 좋아하는 남편과 전단지를 펼쳐놓고 행사 상품에 동그라미를 한 뒤, 배추는 이 마트, 우유는 저 마트 식으로 3시간씩 돌아다니기도 일쑤였다.


빈 플라스틱이나 캔은 모으면 무게로 달아서 돈으로 바꿔주는 재활용센터가 있었다. 집이 정리되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집에서 발생하는 재활용 쓰레기를 잔뜩 모았다. 정해진 날에 유모차에 쌓거나 들고 가서 환전하고는 남편과 푼돈 생긴 것에 소소히 기뻐하며 간식을 사먹었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사는 것이 재밌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홈리스나 돈 없는 사람들이 이용 하라고 일부러 길에 떨어진 플라스틱이나 캔 쓰레기를 줍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고, 우리처럼 멀쩡한(기준은 알 수 없지만)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재활용센터 이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히스패닉이었다. 그 지역 한인들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을 했나 조금 걱정은 했지만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를 모아 환경을 보호하고 알뜰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3년은 금방 흘러갔고, 나는 복직을,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했다.

생활은 다시 전투가 되었다.





<부모교육>

우리나라도 모든 부모가 다 부모교육을 받도록 강제하고 이 날은 직장에서 유급휴가를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행사에 오는 부모님은 이미 자녀에게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을 확률이 높다. 온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성폭력 예방교육, 학교폭력 예방교육, 사이버폭력 예방교육 등의 부모교육은 효과가 너무 적다. 학교 행사에 오지 않거나, 오지 못하는 부모에게도 부모교육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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