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미국에서의 전업주부 적응기 1

40대 과학 교사, 불량 주부 – 30대, 불량 엄마

by 살다

이 김치들을 네가 다 담갔다고?

네, 이제 한국 돌아가면 제가 다 담가드릴게요!




<LA 한인타운 풍경>


남편은 LA 한인타운의 중심지에 집을 구했다. 출근지가 그 근처라 그랬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슷한 일로 파견을 나오신 분들은 한인타운에서 1~2시간 걸리는 곳에 집을 구했다고 했다. 한식 없이 못 살고, 퇴근 후에는 한국 드라마를 봐야 하는 남편의 두 번째 빅픽쳐였다.


큰 한인마트가 여러 개 있는 곳이라 없는 것이 없었다. 한국 마트에서는 본 기억이 없는 천엽 같은 식재료까지 팔고 있었다. 한글 가격표 밑의 작은 영어를 보면 여기가 미국이구나 싶었다.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남미 출신 직원이 한국말로 “시금치? 저기”하며 알려줬다. 한국에서 힘들게 식재료를 싸 올 필요가 없었다.


떡볶이부터 순대국밥, 순두부찌개, 삼겹살 구이, 고등어 구이 정식까지 외식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1인분 양이 많아 2인분을 시키면 세 식구 밥이 되었다. 치즈, 고수를 싫어하는 남편은 그 핑계로 “미국 식당”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았다.


지하철, 버스가 잘 되어 있어 차 없이도 잘 다닐 수 있었다. 산타모니카 해변, 롱비치 아쿠아리움, 게티 센터, LACMA(미술관),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대중교통으로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었다.


눈 돌리면 한국 교민, 남미 출신자들이었다. 한국말과 스페인어만 할 줄 알면 한인타운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심지어 간판조차도 한글이 더 많은 곳이었다. 영어를 쓰려면 영어를 쓸 것 같이 생긴 사람을 찾아야 했다.

미국 간지 며칠 되지 않아 집 밖으로 산책 갔다가 영어로 길 물어보는 것을 하고 싶어서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금발 여자분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말을 걸었다. 그 여자분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보다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어?” 영어를 못하시는 분이었다.



<미국에서의 전업주부 생활>


남편은 바빴다. 요령을 모르는 편이고 책임감이 강하여 퇴근을 해도 퇴근이 아니었다. 시차 때문에 한국에서는 퇴근 후에 자주 연락이 왔다. 남편은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 가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다.

가끔 미국 내 타주로 출장을 다녀왔고, 미국으로 출장 오는 분들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것도 했다. 미국에서 뽑은 직원들은 대부분 미국 시간에 맞추어 근무했지만, 남편은 주말에도 일할 때가 종종 있었다. 가족과 여행이 로망인 남편은 피곤한 중에도 일이 없는 주말에는 가족을 태우고 차를 몰았다.


여행을 간다하면 차로 5시간은 달려야 했다. 한국과 연락이 끊어지면 죽는 줄 알고, 이국적인 향이 나는 음식을 싫어하는 남편이 왕복 10시간 거리를 여행하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무조건 새벽 4시 출발, 도시락 필수. 남편은 이국적인 향만 싫어하지 치즈, 고수를 제외하면 아무거나 잘 먹고 양이 적다. 애는 양이 적고 생선 외에는 해물을 먹지 않는다. 나는 가리는 식재료가 좀 있으나 양이 많고 요리를 싫어한다.

결론은 많은 간식 준비였다. 계란을 10개씩 삶고, 과자, 과일을 잔뜩 담아 큰 장바구니에 담는다. 밥은 긴 핫도그빵과 쏘시지(그나마 미국 향이 안나는 무난한 종류)를 사가서 즉석에서 끼워먹었다. 숙박을 하는 경우엔 컵라면, 김치, 김이 필수였다.


해외 이사 짐을 받아 정리하고 나니 박스가 튼튼해서 아까웠다. 박스 한 면을 열어 2~3개씩 쌓아 아이 책이나 장난감을 넣어 가구처럼 사용했다. 나중에 부모님께서 지내러 오셨을 때 너무 궁상을 떤다고 한 소리 들었지만 남편과 나는 박스 가구가 좋았다. 남는 박스를 이용하여 거실에 만 세 살 아들이 들어가 앉으면 딱 맞는 아주 작은 방을 2개 만들었다. 창과 문을 내었다. 지붕은 없었다. 창문으로 드나들며 너무 좋아했다.


해외 이사 짐을 풀면서 쌓인 회색 전지 크기의 종이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풀어 손도 찍고 낙서도 하며 아들과 놀았다. 고기를 구워 먹거나 기름이 튈 때 바닥에도 깔았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의 덕을 보았다. 이 종이는 어찌나 많았던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썼다.


가장 큰 도전은 아이와 하루 종일 있는 것이었다.

휴직으로 인한 편안함보다 불안감이 더 컸고, 육아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잘 놀아주기도 했지만 아이에게 소리도 잘 지르고 잔소리가 많았다. 이러다가 내가 애를 때리거나 다치게 할 수 도 있겠다 싶은 위기감이 들었다. 집 근처에 있던 한인청소년센터에 한국 상담사가 있다고 했다. 육아로 인한 우울감을 해소하고 자신감을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신 분이고 나는 한국에 돌아가야 할 사람이라 상담을 마칠 무렵에는 육아에 대해 혼란이 조금 늘기도 했다.


두 번째 도전은 김치 담기였다.

한국에서는 어머님께서 담가 주신 것을 먹었는데 생새우를 갈아 넣는 등 워낙 정성을 다해 만드시고 정말 맛있다. 한인마트의 김치는 서울식에 가까웠다. 멸치 젓갈과 마늘이 적게 들어갔다. 남편은 일이 힘들어서인지 나이를 먹어서인지 김치를 입맛에 맞는 것으로 먹고 싶어 했다.

결국 배추를 사서 막김치를 만들었다. 포기김치는 할 자신이 없었다. 남편은 새 김치를 먹으며 너무 행복해했다. 나중에는 파김치, 깍두기까지 만들었다. 시부모님께서 지내러 오셨을 때 나의 솜씨에 깜짝 놀라셨다. 한국 돌아가면 이제 제가 담아드리겠다며 큰소리를 쳤으나 복직 후 워커홀릭으로 살면서 김치는 한 번도 담지 않았다.

요리 실력도 그닥 늘지 않았다.



<미국 파견 근무 시 살림도구 관련 팁>


혹시나 나처럼 살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해외 파견을 간다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적어본다.

집이 인테리어가 되어 있어야 하거나 살림에 욕심이 있다면 좋은 것을 사거나 구해서 쓰자. 나갈 때 다시 팔면 된다. 미국은 한인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어 중고거래가 활발한 편이다. 좋은 살림도구는 생활의 질을 높인다. 편하고 즐겁게 지낸 뒤 조금 가격을 내려 중고로 되팔면 된다.

살림에 욕심이 없다면 되도록 물건을 사지 말고 버티자. 중고거래에 힘을 쓰는 것도 귀찮아할 확률이 높다. 필요 없는 것에 돈을 쓸 필요는 없다. 없으면 안 쓴다. 굳이 오븐이 있다고 쿠키 굽는 쟁반을 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파 없이 생활한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은 어차피 사게 된다.



LA 생활을 간단하게 적어보았다. 다음 글에는 전업 주부로서의 잊지 못할 추억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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