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책장 설치 기사님이 벌컥 화를 내었다. 살림을 챙기기보다 일이 더 즐거운 시기였다.
<한국 입국과 집 구하기>
한국 입국 당시 우리는 새 집을 구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복직을,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했다.
당시 고등학교는 출근시간이 7시 50분까지였고, 퇴근은 나에게 담임을 줄 것이 뻔했으므로 빨라야 18시,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하면 21시, 꾸물럭 거리는 성격 상 22시는 넘어야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아이는 우리보다 훨씬 늦게 등교하고, 일찍 하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 구하는 기준은 주변에 큰 찻길이 없고, 간식 사 먹기 좋으며, 병원과 약국, 학원이 가까우며 장보기 좋은 곳이었다. 장기적으로 보아 혼자 병원을 다니게 해야 했고, 학원은 학력 문제가 아니라 방과 후 시간을 어디선가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육아는 끊임없는 돌보미 구하기 전쟁>
물론 1순위 조건 중 하나는 돌보미 이모 구하기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아이를 초등 입학시켜본 경험이 있는 모든 맞벌이 부모는 기억할 것이다.
부모보다 늦게 집을 나서고 일찍 들어오는 아이에게 열쇠나 비밀번호를 챙기게 하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하지만 문단속도, 열쇠를 챙기는 것도, 비밀도 유지되지 않음을.
초등 저학년은 유치원생과 별반 다르지 않아 장이 약한 아이에겐 배탈이 나서 속옷에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서 뒤처리를 하는 법부터 꼭 숙지시켜야 한다는 것을.(이 부분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이는 아픈데 혼자 집에 와서 화장실 욕조에서 속옷을 벗어 바닥에 두고 몸을 씻고 나오는 것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나도 생각했다. 복병은 따로 있었다. 알림장! 늦은 퇴근 후 문구점이 문 닫을 시간 즈음에 준비물을 확인하고 집을 뛰쳐나가거나 온 집을 뒤져야 했다.
돌보미 이모가 절실했다.
운 좋게 소개를 받아 집 근처에 아주 좋은 천사 같은 돌보미 이모를 복직 전에 구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아들 녀석이 복을 타고 난 듯하다.
일찍 데려 오라시며 아침도 먹여주시고, 늦는 날엔 저녁도 먹여주셨다. 병원, 준비물 등을 다 해결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양육은 너무나 다양한 환경과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여기 밝힐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사정과 우리 아이의 민감성 때문에 1년 후 학교 돌보미, 돌보미 서비스 등으로 방과 후 시간을 관리해야 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런 이유로 아이의 기초생활습관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지금도 후회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학습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돌보미 이모님이 너무 천사 같아 오래 알고 지내기를 바랐는데 몇 년 뒤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무래도 하늘에 천사가 모자랐나 싶었다. 지금도 종종 생각나고 뵙고 싶다.
<아들의 한국 적응과 스마트폰 전쟁>
반평생을 미국서 살다 온 아들은 한국말만 하면 된다는 기쁨과 문화 적응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영어학원은 단호히 거부하여 연계교육을 실패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아들은 매우 방어적이었고 외로웠다. 또래들은 같은 유치원을 나와 친구 그룹이 있었다. 학교 마치고 종종 모여 노는데 아들은 낄 수 없었다. 나는 일을 나가기 시작했고, 주말에도 종종 집에 없었다. 남편은 아이를 잘 챙겨주기는 해도 잘 놀아주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아이는 마음 둘 곳이 없는 상태였다.
병원 트라우마는 1학년 때 피검사를 위해 병원에 갔을 때 절정이었다. 돌보미 이모께 들으니 울면서 간호사에게 욕을 하고 몸을 뒤틀고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패닉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싶었다. 고등학생 나이가 된 지금도 주사를 맞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헛웃음 같은 것이 나는데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돌보미 이모와 헤어지고, 방과 후 돌보미 서비스도 더 이상 가기 싫다고 하여 애와 연락이 힘들었다. 결국 초등 3학년 때 폰을 사러 대리점에 갔다. 귀 얇기가 한지 같은 우리 부부는 지금 막 특가 상품이 떴다는 직원 말에 홀려 계획에도 없던 스마트폰을 사줬다.
스마트폰 사용 시간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아이가 친구들과 대중탕에 갔다가 폰을 잃으면서 한동안 잠잠해졌다. 다른 친구들과 소통이 어려워지고 심심해했다. 이 영향은 컴퓨터 게임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 중독 수준은 아니지만 학업에 충실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방과 후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특히 요리 교실을 좋아했다. 나름 의도를 가지고 듣게 한 수업이라 나도 만족도가 높았다. 부모가 없을 때에도 간식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를 바랐다. 4학년이 되자 아이는 라면을 끓여먹고, 계란 프라이와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저녁을 챙겨주지 못할 만큼 남편과 내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혼자서 끼니를 때우고 TV를 보며 무서움을 쫓았다. 그 모습을 보면 속상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복직 후 과학 교사로서 일 욕심이 나서 대견하게 여기기만 했다. 나도 참 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