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여전한 불량 주부의 분투

40대 과학 교사, 불량 주부로 살아남기

by 살다

여보~. 설거지를 하실래요, 빨래를 개실래요?


빨래 갤께.




<너무 작아서 더 커지는 살림의 특성>


살림을 부부가 같이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더 하는 것이 많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변명인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모든 살림을 세세하게 다 가르치며 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별 것 아니어 보이는 게 많다. 굳이 남편에게 하라고 시키기엔 '저 간단한 걸 꼭 시켜야 해?'싶은 일들이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걸레받이 위에 쌓여가는 먼지들은 가끔 눈에 들어오는데 마음먹고 하려니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고, 평소에 하기에는 청소와 담쌓은 우리 부부에게 요원하다. 화장실 청소도 미루다 도저히 못 견디면 하다 보니 양변기 뒤 물통 위에 먼지가 쌓이는 것도 가끔 발견한다. 남편에겐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매번 내가 발견하고 처리하기 전까지 그런 살림들은 쌓여만 간다.


어느 날은 창틀 먼지가 보여 닦아내고, 어느 날은 냉장고 문에 묻은 얼룩들이 보여 닦고 있다. 이런 소소한 일들에 내 시간이 쓰이고 나면 생각보다 여유가 없다.


금방 먹는 요리는 남편이 종종 하지만 국이나 나물 같은 요리는 내가 하니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은 내가 더 많다. 오늘도 남편은 1시간이 걸려 파전을 부쳐주었으나 나는 2시간을 국 끓이고 나물하고 설거지를 했다. 그게 가끔은 화가 나서 남편에게 청소기를 밀라고 하지만 2주에 한 번 1시간 노동으로는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와중에 착한 여자 모드가 발동되어 남편이 청소기를 미는 동안 짜증 속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곤 한다.


매일 저녁 TV를 끼고 사는 남편은 TV 앞 테이블에 빨래를 마친 옷가지들이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말을 않으면 3일씩도 그대로 있다.


더 웃긴 사실은 나도 그런 것이 잘 안 보이는데 설거지나 반찬을 만들고 있다 보면 하기 싫은 일이니 짜증이 올라오고, 이때 TV 앞에 있는 남편을 보면 개어야 할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와 잔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살림 꽝 남편에게 살림시키기>


남편은 요리를 잘하므로 살림 꽝이란 말을 들으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요리는 살림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 부부는 둘 다 설거지를 싫어한다. 빨랫감을 너는 것도 싫어서 설거지를 내가, 빨래를 남편이 맡았다. 청소를 얼마나 않는 가족인지 살림 나누면서 저 두 가지 나누고는 끝냈다. 설거지는 않으면 그릇이나 수저가 없어 미루는데 한계가 있다. 빨래는 옷가지가 많은 우리 집 특성상 많이 미루게 된다.


남편은 초반에는 빨래를 잘했지만 곧 빨랫감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성격이 미루는 사람이 아니라서 일부러 않는 것이 아니라 안 보여서 못하는 것이었다. 업무 분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살림은 둘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이 잘 보이면 다른 한 명에게 시켜가며 이끌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우리 집 살림 부장이 되기로 했다. 우리 부서가 망하기 전에 누군가는 이 직책을 맡아야 했다.


나는 남편에게 집안일을 종종 시키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거 하세요, 저거 하세요는 듣는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 나는 질문을 한다. 내 질문은 늘 답을 알면서 하는 질문이다.


-여보~. 설거지를 하실래요, 빨래를 개실래요?

-빨래 갤께.


-여보~. 설거지 중이라 빨래 좀 세탁기에 돌려주실래요?

-네, 알겠어요.


-여보~. 세탁기 다 돌아갔나요? 좀 널어주실래요?

-아, 다 돌아갔네. 알겠어요.


남편도 가끔 빨랫감이 쌓여있으면 알아서 세탁기를 돌리지만 대부분은 이렇다. 탈수가 끝난 빨랫감을 말을 않으면 잊고 내버려 둬서 냄새가 나 다시 빠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 남편이 더 자주 그런다.


그릇 설거지를 마치면 싱크대, 거름망 등을 청소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지 어언 10여 년. 이제 설거지를 하게 되면 잊지 않고 싱크대까지 깨끗하게 정리하는 남편을 보면 뿌듯하다. 싱크대 주변 카운터 위까지 닦는 날도 있다.


<'요리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남편이 부추나 파, 콩나물을 씻을 때 대충 씻어왔다는 것을. 우연히 씻는 것을 보았는데 씻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쩐지 가끔 남편의 부추전에서 뭔가 씹히더라니. 10여 년째 먹어온 남편표 맛난 요리들이 달리 보였다. 더 충격은 아들은 전혀 문제없다는 반응이었다는 것. 남자들이 다 이런 것인지 우리 집 두 남자가 이상한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남편이 요리를 싫어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야채 손질의 어려움을 몰랐다는 것이었나 보았다. 2020년부터 제대로 씻게 되었다.


지금도 들으면 화나는 말이 "간단히 국수나 먹자"이다. 국수 삶은 데다 김치만 썰어서 참기름이랑 넣어먹는 수준 아니면 나에겐 다 "요리"다. 그만큼 귀찮다.


평소 냉장고에 시금치 나물 등의 나물이나 야채가 있어야 가능하고, 야채 손질도 해야 하며 국물도 내야 한다. 부추라도 넣고 싶으면 손이 느린 나는 김치에 밥 먹는 것에 비하면 말 그대로 "요리"를 해야 된다.


요리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식재료 손질, 요리 후 뒷정리, 식사 후 설거지까지 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준비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만 괜찮다는 말일까? 늘 궁금하다.


난 자신 있게 말한다. 요리가 싫다. 준비과정과 설거지가 싫기 때문이다.


살림을 싫어하지 않고 잘 "돕는다"라고 생각하는 배우자들은 자신이 살림을 "나누어" 하는 중인지, 그중 큰 덩어리 일부를 하는 중인지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살림은 큰 덩어리도 귀찮지만 요리처럼 부수적인 것들이 더 많고 더 귀찮다.



<여전한 분투>


거의 20년 전 아주 짧은 크루즈 여행을 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늘 먹을 음식이 있고, 푹 퍼져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나 보면서 뒹굴거리는 생활.


요즘도 호시탐탐 그렇게 지내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산다는 것은 살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주고 살림을 맡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유가 되거나 외부인이 살림을 해주는 데 대한 거부감이 없어야 누릴 수 있는 옵션일 뿐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든 나는 맞벌이 주부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분투 중이다. 세상의 많은 주부들처럼.


좀 못하면 어떤가.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이지. 가족과 내가 큰 스트레스받지 않는 지금 수준이 나의 최선이다. 청소, 설거지 미뤄가며 살지만 큰 문제 생기지 않았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살림을 이 정돈해야지 하는 외적 기준에 시달린 분들이 이 글을 보시고 위로받으셨으면 한다.



<불량 주부가 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조건>


남편이 아내가 못하는 일을 잘할 것. 쉽지 않다. 결혼에 엄청난 행운이 따라야 한다.


나는 운이 아주 좋았다. 살림을 내가 더 한다고 적었지만 살림에는 생필품 장보기, 가족 여행 등의 다른 일들도 많다. 위 글을 읽어보면 이런 것에 대한 하소연이 없다. 남편이 다 하기 때문이다.

"파가 비싸다. 고기는 이게 낫다. 저번보다 싸니 행사를 하나?"

나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능력이다. 늘 사는 물품 가격도 기억이 안 난다.


남편은 인터넷 쇼핑도 꼼꼼하게 결재한다. 나라면 도저히 몰랐을 쿠폰이나 행사를 확인한 뒤 뿌듯한 표정으로 "0천 원이나 싸게 샀다." 자랑을 한다.


사야 할 것이 생기면 남편에게 부탁한다. "여보, 봄에 입을 웃옷이 없어요." 곧 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런 것들은 어때요?"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싼 가격에 좋은 옷들을 구해준다. 브랜드 따지지 않는 우리에게 딱인 쇼핑 방법이다.


여행 계획을 잘 짜는 남편은 국내 여행 계획도 플랜 C까지 세웠다. 몇 년 전 남편 없이 뉴질랜드 자유여행을 갈 땐 남편이 세워준 계획서를 들고 그대로 다니면 시내버스 시간까지 딱 맞았다. 심지어 카톡으로 여행 다니는 나보다 더 일정을 잘 안내했다. "이제 00 출발하겠네요. 예약 티켓 잊지 말고 들고 가세요."


나는 아직도 비행기표를 내가 사본 적이 없다.


불량 주부가 되려면 두 가지가 필수다.

더러움에 둔감한 능력, 남편과 일의 합이 잘 맞을 것.


남편에게 감사하다.



계획했던 글을 다 쓰고 나니 숙제를 한 듯 기분이 좋다. 이제 다른 글들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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