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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May 08. 2020

발표가 두렵지 않으려면?

울면서 뛰쳐나간 첫 수업

준비한 수업 내용이 끝났다. 교실 안 사십여 명의 눈이 나만 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15분이 남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진부하지만 이 표현이 딱 맞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교실에서 울 수는 없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앞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교사가 된 후 나를 만난 학생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너스레 잘 떨고 그 어떤 이상한 질문도 넙죽 받아넘기는 좀 별난 과학선생님. 교실에서 울면서 뛰쳐나갔다고?


사범대를 가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다. 나는 아니었다. 늘 과학자를 꿈꿨으나 머리도 노력도 못 미쳤다. 차선책이랍시고 생각한 것이 공대였다. 수학 실력을 생각하면 못 간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눈치가 없어 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은 상상조차 않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여자는 교사가 최고지. 사범대."

생각해본 적 없는 직업이었다. "아버지, 저는 공대."

"아직 어려서 그래. 여자는 공대 가봐야 취직도 어렵다."

"과학이 좋은데. 정 그러시면 물리교육과"

"물리는 천재들이나 하는 과목이다."

"그럼 어디요?"

"혹시 교사 안되어도 취직될 과목은 화학이지. 안 쓰이는 곳이 없다. 화학교육과."


그다지 큰 꿈을 꾸지 않던 나는 못 이긴 척 화학교육과에 들어갔다. 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고등학교 때 가장 재미있어하던 물리와 대학 물리는 차원이 달랐다. 천재가 아닌 관계로 겨우 학점을 받았다. 실험 수업이 있기에 고등학교에 버금가는 시간표를 갖게 되었다. 전체 수강 과목 중 반 정도는 재미있었다.


2학년 말쯤 학년 대표가 말했다.

"교사되신 선배님의 임용시험 체험수기 듣게 강의실로 와."


시험?

강의실로 가면서 동기에게 물었다.

"당연히 공립학교 교사되는 시험이지."


얼마나 교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없었으면 그 때야 알았다. "임용시험"을 쳐야 교사가 된다는 것을.


하교 후 아버지께 따졌다.

"아버지, 교사 되려면 시험 쳐야 하는 줄 아셨어요?"

"그것도 모르고 사범대학 갔더냐?"


그 배신감이란. 시험 통과 못하면 교사가 안될 수도 있는데 사범대를 고집하셨다니. 요즘 고등학생들이 대학 준비하는 수준을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억울했다. 하고 싶지도 않은 직업 때문에 시험도 쳐야 한다니.


수학 공부에 미련이 남아 수학교육을 부전공했다. 학점 이수 시기가 애매하여 교생 실습을 5학년 1학기에 후배들과 갔다.

집 근처 고등학교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다.


교생 실습을 앞두고 중고등학교 때 어떤 선생님을 존경했던가 떠올려보았다. 수면 장애를 겪던 내가 깨어있던 과목은 과학(물화생지)과 정치경제, 미술, 국어 정도가 다였다. 친구가 거의 없고 잠이 많던 나에게 관심을 주시는 선생님은 없었다. 대신 늘 차분하고 꼿꼿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수업을 하시던 중년의 물리 선생님 수업스타일을 존경했다. 대부분이 물리를 싫어했다. 교실에서 나를 포함한 2~3명이 수업을 제대로 듣고 있었다. 가끔 판서 중에 실수가 나오면 조심스레 말씀을 드렸다. 곧 "그렇구나" 하시며 고치셨는데 그런 일은 1년에 1~2번이 다였다. 정확한 정의 설명, 군더더기 없는 표현, 다른 길로 새지 않고 꾸준히 수업을 하시는 모습. 나에게는 이것이 완벽한 수업이었다.


첫 수업을 하게 되었다. 주기율에 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교탁 앞에 서보니 뒤에서 참관하던 것과 달리 엄청나게 긴장이 되었다. 어쨌거나 수업을 해내었다. 준비한 모든 것을 다 진행했다. 시계를 보니 15분이 남았다.


시간이 남으면 교사들은 학생들과 무엇을 할까?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존경하던 물리 선생님은 물리 외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거의 없었다. 사십여 명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되면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딱 한 가지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교실에서 울면 안 돼.


앞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어이없게도 그날의 기억은 여기가 끝이다. 다음날 지도교사께 이런 교생 처음 봤다는 말씀을 들었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 수업이 전혀 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업 중에 시간도 확인하고, 한창 많이 보던 만화나 영화 이야기까지 하며 산만해진 학생들을 나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학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교탁 앞에 서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학생 상담, 체육대회를 비롯하여 많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고민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학생도 있었다. 과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의 반응은 학창 시절 나를 생각나게 했다. 과학을 좋아한다고, 하루 종일 과학만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과학교사로서의 삶이 꽤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교생 실습을 마칠 때쯤 나는 임용시험을 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수업 발표나 대학 면접을 앞두고 걱정하는 학생들에게 늘 나의 첫 수업을 말해준다. 열이면 열, 다 놀란다. 누구나 처음은 있다. 처음부터 준비를 잘해서 완벽한 수행을 보여주면 가장 좋지만 쉽지 않다. 경험이 가장 좋은 해답이다. 무엇이든 한 번 해 본 사람보다는 두 번 해 본 사람이, 두 번 해 본 사람보다는 세 번 해 본 사람이 낫다. 다다익선이다. 발표는 특히 더 그렇다.


수업 중 울면서 뛰쳐나간 전무후무한 교생이 교사로 살면서 깨달은 것이니 믿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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