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골, 초입
새벽 5시 반.
아직 알람이 울리기 전인데 의도치 않게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무언가에 열중했더니 몸이 긴장한 게 아닐까 싶다.
겨우 한 시간 반밖에 자지 못했다. 나는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살짝 짜증이 난다. 눈이 뻑뻑하고 무겁다. 30분만 더 잘까.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흘림골 탐방 예약을 하기 한참 전부터 나는 대청봉에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흔들바위를 본 다음 날인 바로 오늘이 대청봉을 보러 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오늘 가야 적어도 하루는 쉬고 출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흔들바위가 그 자리에 잘 있다는 전제하에 한 계획이지만.
그런데 계획을 짜다 보니 오늘 날씨가 좋지 않다는 거다. 몇 날 며칠을 계속 확인해 봤지만 일기 예보는 계속 비구름을 표시하고 있었다. 어차피 올라가도 경치가 보이지 않을 거면 뭐 하러 올라가나 싶어 실망스럽던 중, 흘림골 탐방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흘림골. 발음이 유려해 말하는 재미가 있는 이름이다. 설악의 대표적인 두 골짜기 중 하나로, 인명 피해가 있어 7년간 폐쇄된 적이 있는 골짜기란다. 이 골짜기가 새로 개방을 했을 땐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을 정도로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흘림골이라는 이름은, 숲이 매우 울창하여 날이 맑을 때도 골짜기 안이 흐릿하게 보인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골짜기라니 대청봉의 대안으로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한 블로그에서 '쉬엄쉬엄' 걷기에 좋은 코스라고 설명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마땅히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날만 갠다면 대청봉에 더 가고 싶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가야 할 것’ 같았다. 대청봉이라는 존재는 내게 잠시 잊혔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다시 떠올라 가시처럼 계속 마음에 걸리며 남아 있는 것이었다.
‘대청봉에 가야 한다.’
그 생각은 묵직하게 마음에 내려앉아 뭉툭한 봉우리 끝으로 쿡쿡 찔러대며 존재감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출발하기 전에는 꼭 대청봉을 가보자 마음먹었더랬다. 그런데 어쩐지 자꾸 핑계를 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흔들바위가 사라진 것도, 일기예보가 좋지 않은 것도 모두 좋은 이유가 되어 주었다.
나는 때때로 내 마음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나조차도 시간이 지나야 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선 피하려는 오래된 습관 때문이려나.
무엇보다 출발하기 전과 달리 흔들바위의 실종으로 머릿속이 가득 들어차 있는 지금, 내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더 이상 머릿속에 남은 공간이 없다. 대청봉에 오르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뤄드리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지금은 그보다 이 엄청난 사건을 해결하는 게 더 시급하다. 물론 아직까지 해결을 위해 행동으로 옮긴 것은 딱히 없지만, 때때로 엄청난 사건은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곤 한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그보다는 눈이 덮여 여백이 늘어난 설악의 눈부신 경치 속에서, 그저 가야 할 길을 따라 쉬엄쉬엄 걷다 보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답을 얻게 될 것 같았다. 흔들바위가 사라진 마당에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오랫동안 덮어 놓고 외면해 왔던 문제에 대해서도.
우선 오늘 날짜로 예약을 해 두었고(큰 충격을 받아 잊어버렸지만), 아침에 부지런히 걷고 점심을 먹은 후 숙소에 들어와 오후에는 푹 쉬면 되겠다 싶었다.
흔들바위를 보러 간 날,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일이다. 바위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음엔 대청봉에도 꼭 올라가 보자고.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서 대청봉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왜 어린아이들이 더 산을 잘 타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나. 흔들바위까지 가는 길이 내겐 그렇게 힘들지 않았기에 대청봉도 쉽게 올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뒤에도 종종 내게 대청봉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버지는 바빴고 대청봉은 살던 곳에서 꽤 멀었으며, 나 역시 커가며 그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계속해서 생겨났기에 약속은 계속해서 미뤄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 일’이 있은 뒤 점점 아버지와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대청봉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아마 떠올리지 못했을 만큼 기억 저편으로 멀리.
30분이 벌써 지났나. 나는 울리는 알람을 끄고 비몽사몽 한 채로 오늘의 날씨를 한 번 더 확인한다. 역시나, 아직도 구름이 개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그럴 예정이다. 대청봉에 가지 못하는 여러 이유를 대며 애써 정당화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기에, 나는 둘 중 어느 곳을 갈지 방금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골짜기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구름을 뚫고 대청봉에 올라갈지.
혹시나 날이 갠다면, 그래서 아버지가 그토록 함께 보고 싶어 했던 그 웅장한 경치를 보며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내일 아침에라도 마음을 바꾸자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들었던 터였다.
사실 그래서 6시에 일어나려고 했던 거다. 대청봉에 오르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서 다시 한번 날씨를 보고 결정하려 했는데 예보대로 날은 흐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구름 사이로 해가 살짝 보이던 아이콘은 그냥 구름 하나로 바뀌어 버렸다. 게다가 습도까지 70퍼센트라니. 이건 안개들의 잔치가 틀림없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보았다. 역시나 하늘이 뿌옇다. 어쩔 수 없이 대청봉은 포기하고, 흘림골로 가기로 한다.
9시부터 10시 사이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예약했으니 적어도 8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래도 대청봉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럼 조금만 더 잘까.’ 흘림골에 가기로 하니 왠지 모르게 시간을 번 느낌이다. 무려 두 시간이나 더 잘 수 있다. 무거운 마음도 잠시, 추가 수면의 기쁨에 나는 알람도 불도 모두 끄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불속에 꾸물꾸물 들어간다. 그리고 뒤척이며 달콤한 잠을 얕게 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8시 반 즈음이다. 아이고, 이젠 정말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일어나서 빠르게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어제처럼 등산에 필요한 복장을 입고 장비를 갖춘다. 307호의 불이 어제와 같이 꺼진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도 없는 프론트를 지나친다. 카드키와 등산 스틱의 꼭지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방 옆 주머니에 넣고 자크를 잘 잠가 둔다. 조수석에 가방을 던져두고 시동을 걸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떠올린다.
우선 30분 정도 떨어진 오색약수터 주차장에 가서 차를 대고,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흘림골로 가야 한다. 왜 주차장이 없는 건지, 이건 택시 회사와 분명 리베이트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쓴다. 택시가 바로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못 들어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꾸물거린 탓에 생각보다 늦어진 시간에 마음이 급해진다. 엑셀을 세게 밟는다.
양양으로 가는 톨게이트를 지난다. '양양이라니 처음 가보는걸.' 왠지 모르게 설렌다. 한 나라 안에 있지만 살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장소를 밟게 될 때의 떨림이리라. 이제 구불구불한 시골길이 나온다. 도로의 옆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마치 우거진 숲 속을 운전하는 기분이다. 코너링이 너무 많아 속도를 자주 줄여야 하는 게 다소 성가시지만. 카레이싱을 하는 기분으로 방향감각을 발휘하며 어지러운 구간을 빠져나오니 드디어, 오색약수터 주차장이 보인다.
다 왔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급하게 들어가려는데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다. 뒤따라오던 차들도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들어오지 않는다. 여기가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아직 3분이나 더 가야 한다고 나온다.
‘뭐야, 주차장이라는 표식만 보고 급하게 들어와 버렸잖아.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나는 툴툴대며 다시 밖으로 나온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니 이번엔 막다른 길이 나온다. 짜증이 확 난다. 뭔 놈의 내비가 맨날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지 알 수가 없다. 한숨을 푹 쉬며 블로그에 들어간다. 그래서 대체 어떤 주차장에 차를 대야 하는지 함께 올라온 사진을 보며 꼼꼼히 확인한다. 제기랄, 아까 그 주차장이 맞다.
혈압이 오르는 걸 겨우 참고 다시 3분을 돌아가 아까 그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젠 들어가기도 지쳐 내부가 아닌 지상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댄다. 시동을 끄고 가방을 내리려는데, 아까부터 건너편에서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여자가 자꾸 신경 쓰인다.
'혹시 흘림골로 가는 택시를 예약한 건가.' 만약 맞다면 같이 타자고 해야겠다 싶어 나는 급하게 짐을 챙긴다. 그러던 중 버스가 온다. 옳거니, 버스를 타려는 거였구나. 혹시나 탈 수 있을까 해 급하게 걸음을 빨리해 보지만 여자가 버스에 타고 버스는 출발한다.
‘아, 오늘 왜 이렇게 운수가 나쁘냐. 에이, 못 타겠구나.’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정류장을 향해 뛰던 걸음의 속도를 늦춘다. 우리 동네에서는 정류장이 아닌 곳이면 기사님들이 절대 태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버스에 타고 싶은 눈치였다는 걸 알아보신 천사 같은 기사님이 천천히 내 옆에 멈추어 문을 열어준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묻는다.
“기사님, 흘림골 가요?”
“흘림골? 안 가. 그건 반대잖어.”
아 반대구나. 왠지 모르게 다행이다 싶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선 이제 택시를 어떻게 부를까 고민한다. 이런 곳에서는 보통 택시 앱을 잘 쓰지 않는다. 금액도 미터기가 아니라 정액제다. 어떻게 택시를 잡을까 어제부터 걱정이었는데 마침 아까부터 편의점 앞에 택시가 한 대 서 있다.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있는 기사님께 반갑게 손을 흔들며 타도 되냐고 묻는다. 어서 타라는 손짓에 택시로 다가간다.
“기사님 흘림골 갈 수 있습니까? 얼마나 걸리나요?”
시간은 벌써 9시 40분. 마음이 급하다.
“7분 정도면 가요.”
휴, 다행이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가격은 얼맙니까?”
“만오천 원.”
“네, 알겠습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차에 탄다. 만 오천 원이 절대 나오지 않을 거리겠지만, 관광지에선 관광지의 법을 따라야 한다. 기사님이 나를 따라 바로 운전석에 탄다.
차 안에 가득 찬 담배 냄새에 창문을 열어 놓자, 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더욱 차게 느껴지는 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택시가 달리면서 빠르게 코 안쪽 면에 닿는 산공기가 제법 상쾌하다 못해 시려울 지경이다. 신선한 수액을 긴급 처방받은 듯 급속 충전되는 기분.
기사님은 터프하게 운전하다가도 자주 길을 멈추며 각 봉우리와 산의 이름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한 곳에 오래 계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오지랖 같은 거다. 아름다운 경치를 뭣도 모르고 봐서는 안 된다는 그런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리라.
봉우리 당 오만 원이라 자세히 설명해 준다는 기사님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젠에 딸려 온 찍찍이를 어떻게 쓰는지 여쭤본다. 관광객을 많이 보셨으니 혹시 아시지 않을까 싶어 말이다. 기사님은 같이 고민해 주지만 모르겠다고 하신다. 나는 잃어버리니 가방에 넣어 놓으라는 기사님의 말을 착실히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