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골, 하산
물을 한 잔 먹고 내려갈 채비를 한다.
마음이 편치 않다. 정상이 주는 달콤함이 참 좋았지만 내려갈 힘을 낼 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그 성취감도 고고요함이 주는 평안함도 좋지만, 이제 올라온 만큼 또 내려가야 한다. 그 말은 즉슨 지금까지 고생했던 걸 그대로 한 번 더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벌써부터 까마득하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제 내리막길만 남아 있을 거라는 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막상 하산을 하다 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 물론 체력이 남아 있지 않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거기에 한술 더 떠 하산길에는 위험 구간이 너무나도 많다.
빙결이 두꺼워 계단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을 지나가야 하는데, 올라올 때는 어떻게든 사족보행으로 얼음을 찍으며 왔다 해도 내려갈 때는 그야말로 얼음 절벽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이니 이건 미끄러지지 않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다.
등산객들이 다칠까 걱정이 됐는지, 국립공원 측에선 위험 구간을 시작, 중간, 끝으로 나누어 코팅지와 줄로 표시를 해 놓았다. 위험 구간 시작, 위험 구간 중간이 지나고 나면 또 위험 구간이 시작된다. 그게 세네 번 반복되고 있다. 위험 구간 ‘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니 대체 위험 구간이 아닌 곳이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다. 폭설이 내린 산은 이미 그 자체로 위험한 게 아닐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위험 구간은 실제로 정말 위험하다. 우선 길이었던 것들이 모두 눈으로 뒤덮인 경사, 안 좋게 말하면 통째로 긴 낭떠러지가 되어 버린 건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아까와 달리, 이건 내리막길이다. 발이 쭉 미끄러져 십년감수할 뻔한 게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식은땀이 나 정신 똑바로 차리자며 스스로를 타이른다.
발에는 절대 힘을 빼면 안 되고, 발가락 끝까지 움켜쥐며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경치를 구경해서도 안 된다. 이미 올라올 때부터 너무 많이 본 광경인 데다가 육체의 고통이 심해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선은 오직 내 발밑이어야 한다. 온 신경은 안전하게 다음 발을 둘 위치를 찾는 데 가 있어야 한다. 손은 넘어질 걸 대비해 늘 준비 상태여야 한다. 발자국이 미끄러져 길게 이어진 자국은 절대 밟아선 안 된다. 게다가 쇠로 된 계단은 아이젠에 잔뜩 묻은 눈 때문에 아주 미끄럽다. 너무 힘들지만 그만 내려갈 순 없다. 빨리 이 고된 산행을 끝내고 온천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은 생각뿐이다. 오직 그 생각을 하며 버틴다.
오늘은 산행 후 전설의 온천에 가려고 한다. 어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커다란 바위에 ‘전설의 온천’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귀여우면서도 그 당당함이 제법 뻔뻔해 헛웃음이 났다. 얼마나 좋은 온천이길래 ‘전설’까지 붙나 한번 보자.
말은 이렇게 해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아픈 다리를 뜨끈한 물에서 주물러 풀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려오는 동안 온천에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함은 점점 커진다. 가도 가도 끝이 나지 않는 길은 사람을 정말 녹초로 만든다. 살방살방 1시간 40분이면 걷는다던 탐방은 시작한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었지만 아직도 꽤 남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칠 무렵, 지친 마음을 달래줄 만큼 빼어난 경관이 등장한다. 오색 빛깔이 영롱한 샘이다. 시원한 물소리에 정신이 번쩍 난다. 힘든 와중에도 감탄이 나온다. 폭포수가 고여 샘이 만들어지고 그 물이 흘러 아래에 또 샘이, 그 물이 또 고여 밑에 더 큰 샘이 만들어져 있다. 마치 물수제비를 뜨는 것처럼 샘에 샘이 이어져 있다.
물이 참 맑다. 너무 맑아서 깨끗한 정도가 냄새로도 느껴지는 것 같다. 청아하고 상쾌한 물냄새가 코를 씻어 준다. 선녀가 목욕하는 12개의 탕이라고 하여 십이선녀탕이라고 불리는 샘은 비취색을 띠고 있다. 흐르는 물을 따라 일렁이는 빛이 가히 오색이라 할 만하다. 빨, 주, 노, 초, 파란색이 그 안에 모두 있으니 말이다.
나는 몸을 쉬게 할 겸, 한참 동안 샘을 바라보고 있는다. 위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작은 폭포를 만들며 아랫 샘으로 이동한다. 폭포에서 흘러나온 세찬 물살은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길을 찾아 흐르기도 하고, 좁은 틈을 뚫고 지나가며 결국 물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은 수없이 쪼개지고 합쳐지며 주전골을 쓰다듬고 있다. 가장 높은 곳부터 가장 낮은 곳까지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이런 점도 참 공평하네.' 나는 살짝 미소 짓는다. 흐르는 물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재밌는 것을 발견한다.
한 샘 속의 돌들 사이에 나뭇가지가 걸쳐져 있다. 물에 떠 있던 나뭇잎들은 흘러가면서 다 그 나뭇가지에 걸려 뭉치게 된다. 그 뭉치가 커질수록 나뭇잎이 더 잘 걸리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래부터는 샘에 가라앉은 나뭇잎 하나 없이 깨끗한가 보다.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전자라면 놀랍도록 영리하단 생각이 든다. 예부터 내려오던 방법인가. 참 신기하다.
그 앞에 서서 나뭇잎들이 가지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다.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그 가지를 붙잡고 서로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떨어진 이후에도 가지를 찾는 나뭇잎. 그 모습을 보며 태완은 조금 이상하게도 엄마 품을 열심히 파고드는 돼지 새끼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지고 개운하게 땀도 흘린 후 몸을 쉬고 있으니 다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사람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 물소리만이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덕에 나는 서서히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