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림골, 회상
P리에는 유난히 맑은 계곡이 있었다. 그건 우리 마을의 자랑이었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기에 그 물로 담은 막걸리가 특산품이었고, 농산물이 맛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여겼다.
아버지는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과일부터 채소까지 다양한 작물 농사에 밝았고, 또 손도 야무져 농번기엔 너도나도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싶어 했다.
온 가족이 계곡에 놀러 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새벽부터 밭에 나가 상처 입은 과일은 없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하루쯤 거를 법도 한데 아버지는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잘 익은 복숭아 두 개를 골라 바구니에 담아 왔다.
계곡은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의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날이 너무 더울 때면 갑자기 계곡으로 놀러 가곤 했다. 그건 무더운 여름을 나름대로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우리만의 방법이었다.
초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아버지 손을 잡고 계곡을 향해 간다.
아버지의 넓은 보폭을 애써 따라가려다가 지친 내가 투정을 부리면 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잠시 멈춘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고, 새들이 째깍대는 소리.
솨아아 하고 나무들이 잎을 부딪히는 소리.
태양을 온몸으로 막으며 밝게 빛나던 나뭇잎과 그 틈사이로 반짝이를 뿌려놓은 듯 눈부시던 햇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향연. 후덥지근한 몸을 식히는 골짜기의 서늘한 바람.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무렵 엄마는 집에 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커녕,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볼 수 있었으니까. 일이 없을 때도 피곤해서 집에 있겠다던 엄마였기에, 아버지와 나는 늘 둘이서만 조용히 계곡을 다녀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늘 예쁜 복숭아 두 개를 따왔고, 엄마가 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 복숭아를 식탁 위에 하나 올려두었다.
그렇게 둘이서 자주 가던 계곡이었는데, 그날은 왜인지 엄마가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신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계곡 가는 길엔 어떤 새를 볼 수 있는지, 물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돌은 무엇인지. 숨바꼭질을 할 때 몸을 숨기기에 좋은 나무는 무엇인지, 어느 지점에서 물놀이하는 게 제일 재밌는지 엄마에게 알려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가끔은 함께 가자 조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피곤하다고 누워있는 엄마를 보면 아버지가 쉿 하고 손가락을 갖다 댄 채로 나를 데리고 방을 나가려 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복숭아 두 개를 따왔다. 초여름의 따가운 태양에 불그스름하게 익은 복숭아가 새큼달큼한 향내를 풍기는 것이 유독 맛있어 보였다. 차가운 계곡물에 담갔다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엄마는 간단한 도시락을 쌌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에 나는 매우 들떠 있었다.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서 도시락을 싸는 엄마의 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우리 셋은 계곡으로 출발했다. 나는 발을 가만두지 못하고 콩콩 뛰며 엄마에게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듣고 있는 건지 무표정한 얼굴로 이따금씩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한참을 혼자 떠들고 나자, 나만 빼고 아무도 말을 안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아버지는 내 말에 하나하나 맞장구를 쳐주며 웃기도 하고 웃겨주기도 했을 텐데 말이다. 그제야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아버지가 혼자 있을 때 그러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걸 어린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원래는 아버지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땐 행여 아버지가 표정을 들키면 멋쩍을까 봐 멀리서 가만히 보고 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힘든 기색을 잘 내비치지 않는 분이었다. 그래서 늘 웃고 있는 아버지가 힘든 건지 슬픈 건지 분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칠 년을 붙어 있다 보니 그때쯤엔 아버지의 표정을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엔 내가 기다리다 못해 부르면 아버지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버지는 내가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자 내가 그쪽이 아니라고 소리치면서 길고 긴 정적이 깨졌다.
그 순간 내 귀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매끄럽게 빛나며 우릴 감싸고 있던 유리 포장지가 사방으로 갈라지고 부서지는 듯한 파열음.
다시는 붙일 수 없는 파편들로 나뉘는 균열의 소리.
그 베일 듯 날 선 조각들이 귀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나는 잠시 움찔했다.
다시 몸을 돌려 계곡을 향해 가면서 나는 아버지 손을 꼭 붙잡았다. 아버지는 다시 내 손을 힘주어 잡으며 몇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감추었다.
그러나 애써 훔치지 못한 슬픔이 아버지의 눈가에, 입꼬리에 남아 대롱대롱 걸려있는 걸,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엄마는 몰라도 내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