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00'의 시대(19)

흘림골, 회상 2

by 향연

어머니는 **리의 우등생이었다.


이 깡촌에서 어떻게 이런 학생이 나왔느냐며 동네 사람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엄마를 어떻게든 더 공부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거의 모든 걸 팔아다 엄마를 서울로 유학 보냈다. 엄마는 거기서 그토록 좋아하는 공부를 원 없이 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외할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면서, 엄마는 고등학교 첫 해를 마치지 못하고 급하게 낙향해야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외할아버지 건강까지 안 좋아지자 병간호를 하고 동생들을 돌보느라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엄마는 공부를 사랑했고, 서울을 동경했다. 그러나 현실은 반복되는 육아와 집안일, 병수발로 가득 찬 똑같은 일상이었다.


그러다 엄마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다가 이사를 간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낼 곳을 찾다가 어릴 적 좋은 기억이 있던 **리로 다시 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말투는 조금 무뚝뚝해도 행동으로 다정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또한 농사를 어찌나 잘 짓는지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일꾼이었다. 요령 피울 줄은 모르지만 무척 성실하고 정직했다. 아버지는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작은 밭을 하나 마련했고, 아버지가 밭을 잘 보는 탓에 늘 풍작이었으며 작물의 맛도 좋아 나중엔 심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팔려 동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만큼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길 바라셨다고 한다. 엄마도 동네 어르신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한 농사꾼이 싫지 않았기에 둘은 결혼을 했고 아버지의 밭 근처에 집을 구해 살림을 차렸다. 동생들도 이제 다 커서 뿔뿔이 흩어졌기에 두 사람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곧 내가 생겼다.


엄청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었지만,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편이었고, 엄마를 많이 배려했다. 그러나 엄마는 자유를 원했다. 이제야 비로소 외할아버지와 동생들 수발에서 벗어났는데, 또 갓난아이 육아를 해야 하는 걸 매우 싫어하고 답답해했다고 한다. 엄마는 공부를 하고 싶고 서울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산후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내가 세 살이 되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촌의 어느 가을날, 아버지는 갑자기 농사일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옆 동네에서 급하게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엄마의 우울감이 심하던 터라 아버지는 하루 종일 엄마 혼자 나를 보게 할 수가 없어 한사코 일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장이 말하길, 이 사람이 워낙 대지주라서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마을이 농사를 짓는데 분명 어려움이 있을 거라 했다. 이장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나와 엄마를 두고 아침부터 밤까지 며칠간 옆동네로 일을 하러 갔다. 그러다 그 사달이 난 것이다.



엄마와 내가 점심을 먹고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는데, 마을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 우리 집 문을 마구 두드렸다. 아버지가 다쳤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들쳐 업고 옆동네까지 달려갔다. 아주 어릴 때지만 나는 그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사다리 아래에 누워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있는 아버지와 뼈가 살을 찢고 드러나 피가 철철 나고 있는 왼팔.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 나를 정신없이 내려놓고 비명을 지르며 아버지에게로 달려가던 엄마. 늦은 밤이라 의원들이 문을 닫아 아버지는 다음 날에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왼팔은 끝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여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팔을 치료받는 동안 당연히 농사일을 지을 수 없었기에, 몇 달간 생계를 위해 엄마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아직 세 살 배기였지만 엄마는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그러다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 방문판매를 시작했다. 오늘은 이 동네, 내일은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 이불부터 속옷, 된장, 신발, 화장품 등 온갖 것들을 팔았다.


처음엔 힘들다고 했지만, 육아만 하다가 사람들도 만나고 제법 쏠쏠하게 자기 돈도 벌 수 있으니 엄마는 갈수록 즐거워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집에 들어왔지만, 점점 다른 아주머니들 집에서 밤새 놀다 또 어디론가 훌쩍 일하러 가는 날이 늘어났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집에 온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낯설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반년 후 팔이 어느 정도 나아 다시 농사를 짓게 된 후에도 아버지가 육아를 전담했기에 나는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엄마와 잘 다투는 편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엄마에게 거의 맞춰줬기 때문이다. 엄마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설사 그게 일이 아니라 놀러 다니는 것이라 해도 아버지는 엄마에게 화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그저 엄마가 답답하고 울적해하던 옛날보다 밝아진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가끔은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같이 계곡도 가고, 다른 아줌마들이랑 놀러 가듯 우리와도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 텐데.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엄마가 즐거워하잖니.” 하고 말하면서.



물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얕은 물살이 동글동글한 자갈 사이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계곡에 다 왔다는 신호다.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나와 아버지가 항상 돗자리를 펴는 큰 떡갈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그늘 아래서 엄마와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며 폴짝폴짝 뛰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약간 떠오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꺼내는 사이, 나는 재빠르게 계곡으로 달려가 시원한 물에 발을 담갔다. 초여름만 해도 얼음장 같던 물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살짝 미지근해져 딱 발 담그기 좋은 온도가 되었다. 나는 커다란 돌에 앉아 발장난을 치며 물을 튀겼다. 물이 발가락을 훑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감각, 간지러울 정도의 압력, 이리저리 바뀌는 물살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는 변주. 가만히 그걸 느꼈다.


그러다가 뜨겁게 데워진 돌에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겠다 싶어지면 웃통을 벗고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덥지도 않은지 엄마와 돗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제법 후덥지근한 날씨에 걸어오느라 땀으로 가득한 몸을 시원한 계곡물에 담그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는 개헤엄도 치고, 물수제비도 뜨고, 잠수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러다 물속이라 흐릿해진 시야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걸렸다. 그때부터 나와 은빛 꼬리 사이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나는 손을 뻗고 박수도 치고, 헛손질도 하며 열심히 은빛 꼬리를 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는 최대한 움직임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은빛 꼬리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지금이야.’


재빠르게 손을 뻗어 콱 움켜쥔다. 손아귀에서 팔딱팔딱 요동치는 세찬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기쁨으로 소리 지르며 물속을 헤치고 일어섰다.


“잡았다, 엄마 중태기 잡았어요!”


신난 내 함성에 아무런 답이 없자 나는 버들치를 손에 들고 물밖으로 나갔다.



떡갈나무 아래 복숭아 두 개, 그리고 엄마가 싸 온 도시락이 손도 대지 않은 채로 펼쳐져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둘이 함께 앉아 있었는데, 아버지는 돗자리 끄트머리에 등을 돌리고 혼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어깨가 가만히 들썩였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갑자기 하늘이 땅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의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아부지..”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아버지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는 어디 갔어요?”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가 붙은 질문. 이미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다는 확신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모두 가득 담겨 있는 문장이었다. 아버지는 내쪽으로 고개만 살짝 돌려서 말했다.


“먼 길 갔어.”


먼 길이라니 어딜 간 걸까. 다시 돌아오긴 하는 걸까. 이상하게도 어린 나의 예감은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언제 와?”


어쩐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묻자 아버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모르지...”


한숨을 푹 내쉬며 흘러나오듯 대답하는 아버지의 얼굴에 괴로움과 허탈함이 가득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아버지를 꼭 안아주었다. 넓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가 슬픔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힘껏 안고 한참 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의 들숨과 날숨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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