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00'의 시대(26)

by 향연

“어 진주 일어났어?”


잠을 거의 못 자 피곤한 상태로 방문을 연다. 거실에서는 엄마가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이게 다 뭐야..?”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 난장판이 된 거실이다.


앙증맞은 분홍색 토슈즈와 어깨에 셔링이 잡힌 아주 작은 발레복, '은주의 첫 수업♥' 자수가 놓이고 레이스 장식이 달린 발레 가방, 작은 스트레칭 매트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아, 은주 발레학원 보내볼까 하고. 요 앞에 생겼더라. 정서발달에도 좋을 거 같구. 친구들이 다들 간다는 데 안 갈 수가 있어야지.”


엄마는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없는 게 없어 보이는 갖가지 발레용품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리본도 레이스도 다 새 거라 아주 빳빳하고 반짝반짝하다. 토슈즈도 발레복도 나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들인데. 눈앞에 놓인 분명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그저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 분홍빛이 뿌옇게 번지자, 눈물이 흐를까 재빨리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돌이 어떻게 토슈즈를 신어.”


나는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 볼멘소리를 한다.


“아, 다 방법이 있어. 사람처럼 한 켤레를 신는 게 아니라 바닥 부분 전체를 감싸는 토슈즈를 사용한대. 음.. 그러니까 염색할 때 머리에 쓰는 비닐처럼 말이지.”


눈치도 없이 신나서 설명하는 엄마의 눈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하던 것을 마저 한다. 나도 토슈즈 갖고 싶었는데 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몇 번이고 고민하다 그냥 삼켜버린다. 속 좁고 유치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근데 지금 뭐 하고 있어?”


“이거 은주 발레 일지. 선생님이 매 수업마다 일지를 적어준대. 오늘은 뭘 배웠고 무슨 동작을 어떻게 했고 그런 거. 집에서 읽어보고 칭찬해 주라고 하네.”


엄마는 공책 앞면에 하트 스티커를 꾹꾹 눌러 붙이고 있다. 발레 일지라니. 나에겐 그토록 무심했던 우리 엄마가, 돌멩이에겐 이렇게까지 마음을 쏟는구나.


'엄마가 그 정도로 극성인지 정말 몰랐네.'


마음속으로 이렇게 읊조리며 분주한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엄마와 돌멩이 물건으로 가득 찬 부엌. 그곳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아서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다. '발레'라고 하니 기억 저편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아주 소중했던 것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오래된 일기장을 꺼낸다. 일기장 가장 마지막 페이지 사이에 껴놓았었는데. 그래 여기 있다. 눈에 익은 반가운 귀퉁이를 잡아당기자, 빛이 바랬지만 어찌나 소중히 다루었는지 주름 하나 지지 않은 전단지가 나온다.


‘하나 발레 학원’


이게 얼마만이야. 오랜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애틋한 눈빛이 나오며 미소가 지어진다. 그 글자를 하나하나 손끝으로 조심스레 더듬는다.


‘여기가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


전단지 가운데에는 예쁜 발레리나 언니가 아라베스크를 하고 있다. 한 다리는 땅에, 한 다리는 하늘에 두고. 두 팔과 시선은 우아하게 위를 향하면서. 이 자세를 참 많이도 따라 했었다. 나는 예전처럼 전단지를 들고 일어서서 아라베스크 동작을 흉내 낸다.


‘이렇게 하는 거였나?’


기우뚱거리며 쓰러지려는 몸을 거울에 비추면서 동작을 고쳐본다. 오랜만에 하려니 잘 되지 않는다. 몇 번 애를 써보다 그만둔다.


‘아, 그것도 있었지.’


과거에 나를 위로해 줬던 것들이 지금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소중했던 것들을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금방 기분이 풀릴 수가 있다니.


나는 신이 나서 옷장 깊숙한 곳에 있던 소중한 것들을 모아 놓은 바구니를 꺼낸다. 그리고 그 바구니 가장 안쪽에서 토슈즈와 발레복이 나와 있는 브로슈어를 찾아낸다. 그걸 보자마자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아름다운 사진이 잔뜩 실려있던, 나의 작은 보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도 많이 봐서 접히는 부분이 다 해어진 브로슈어를 살살 펼친다.


‘지금 봐도 예쁘다.’

나는 입을 헤 벌리고 몰입해서 구경하던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 마치 나와 발레만 존재하는 세상에 잠시 머물던 그때처럼.


브로슈어 속 토슈즈들은 정갈하게 놓여 빛이 나고 있다. 누군가의 꿈과 열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또는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연핑크 새틴 소재에 고운 리본이 길게 이어진 기본형 토슈즈부터,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무대용 토슈즈,

작은 자수가 새겨진 한정판 모델,

발레복은 또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의 레오타드와 하늘하늘 꽃잎 같은 시폰 스커트들. 동화 속 공주님이 입을 것 같은 튜튜.


저 치마를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읽느라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저걸 입고 아라베스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나는 몇 쪽에 어떤 토슈즈가 있는지, 거기에 달린 리본은 무슨 색이고, 큐빅은 몇 개인지, 어떤 디테일이 더해져 있는지 망설임 없이 단번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책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을 만큼 줄줄이 꿰고 있었다. 몇 번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여러 번 보았지만, 매번 그 감동은 여전했고 나는 늘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브로슈어를 탐독했으니까.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그 브로슈어에 적힌 발레 매장에 가서 엄마가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다면 나는 무슨 토슈즈를, 어떤 스커트를 고를까. 그러면서 아주 진지하게 거기 있는 것들을 비교하며 순위를 매기곤 했다. 가장 먼저 이걸 사고, 이게 안 된다면 그래 저게 좋겠다. 아냐, 이게 나을까.

그건 나에게 어떤 소꿉장난보다, 동화 속 왕자님이 나를 구해주는 신데렐라가 된 역할극보다 재밌는 놀이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저 상상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혹시나 내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렘은, 비록 가상일지라도 어린 나를 금세 행복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속 일 등이었던 발레복과 토슈즈를 찾으며 한바탕 추억 여행을 하고 나니 브로슈어의 맨 뒷장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초급부터 프로까지, 당신의 첫 무대를 위한 최고의 선택’


마치 하나밖에 없는 사탕을 천천히 아껴 먹듯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고 난 후 저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벅찼다. 그 문장을 몇 번 읊조리고 나면 나도 언젠간 저 토슈즈와 발레복을 입고 ‘첫 무대’를 준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 믿음만으로도 한동안은 견딜 수 있었다. 며칠간은 내가 벌써 발레리나가 된 것 같은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나비처럼 독무대를 선보이는 나의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다 씹던 껌의 단물이 빠지고 신기루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다시 너무나 차갑고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내가 여기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현실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낯선 여행지에 불시착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어서 밀려오는 허탈함을 느끼면서.


발레는 내 의지대로 해보고 싶다고 선택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그리고 아주 간절히 원했던 무언가가 좌절된 이후에는 딱히 가지고 싶은 게 없어졌다. 첫 의지가 좌절됐던 기억이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무언가를 열렬히 원하는 것에 반사적인 두려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친구도 대학도 직업도 연애도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상황에 맞게 가져왔고 무엇 하나 내가 원해서 직접 선택한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성격이 좋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는 거였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사는 게 참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무언가 되어보고 싶다는 욕심,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 이루고 싶었던 꿈, 받아보고 싶었던 사랑까지. 브로슈어 안에는 정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손끝까지 힘을 주어 간절히 뻗었던 팔은 끝내 꿈에 닿지 않았고, 소녀는 발레복을 입어보지도 아라베스크를 배워보지도 못했다. 무대 위에 서 나를 펼쳐 볼 기회도 눈부신 미래를 꿈꿀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상상만으로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발레를 배우고, 레슨을 받고, 그걸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가는 친구들과 나 사이의 격차, 그 간극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질 때쯤 비눗방울이 툭 터져 그 차갑고 따끔한 촉감이 얼굴에 느껴지는 것처럼 나는 깨닫고 만 것이다. 그 꿈을 정말 이젠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저 허무한 공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브로슈어를 꺼내 본 적이 없었다. 바구니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넣고 옷장 깊숙이 숨겨 두었다.


발레에 대한 건 더 이상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레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꿈꾸고 바라며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제는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미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보면 바보같이 다시 꿈을 꾸게 되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스웠기 때문이다. 단 꿈에서 깬 그 순간이 얼마나 허무하고 쓸쓸한지 알기에 그걸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씁쓸함을 다시 느끼며 나는 전단지와 브로슈어를 가지런히 정리한다. 혹여나 잃어버릴까 두 장 모두 바구니에 고이 넣어 다시 옷장 깊숙이 가져다 둔다. 문득 아까 보았던 은주의 토슈즈와 스커트, 레오타드가 떠오른다. ‘은주의 첫 수업’이라고 수놓아진 가방까지.


‘부럽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아까부터 계속 참아왔던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다. 부럽다. 한번 꺼내고 나니 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부럽다. 너무 부럽고 질투가 나서 미칠 것만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황당할 지경이다. 돌을 부러워하게 될 줄 상상이라도 해봤겠는가. 너무 어이가 없어 나조차도 웃음이 날 지경이다.


헛웃음을 지으며 나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는다. 무릎을 끌어당겨 고개를 가만히 올려놓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구체화하고 싶지 않은, 그러기가 무서운 감정들이 울컥울컥 치밀어 오른다. 의심과 불안, 원망과 부정, 소외감과 박탈감, 그리고 비참함.


그러나 그 감정들은 이불 밑으로 다 밀어 넣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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