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놓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 물건들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데에는 거기 깃든 나의 시간도 한몫을 차지한다.
물건에는 그것을 살 때의 나, 그것을 쓸 때의 나, 그리고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으며 나는 그 시간을 존중하고 싶은 것이다. ]
[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누구나 매일 그럴 것이다. 물건들의 시간과 함께하며.. ]
== 은희경 "또 못 버린 물건들" 중에서==
12월 한해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고 마음이 더 분주해졌다.
크게 불편한 것을 느끼지 않았던 일상이었지만 12월의 달력을 확인하자 뭔가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두 번 사용하고 한자리에 모셔둔 마사지 기계와 수첩과 노트를 보면 사고 보는 오랜 습관으로 책장 모퉁이에 잔뜩 모여있는 신상 아닌 새것.
남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특가로 나왔다며 종종 사주었던 비슷한 종류의 옷가지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옷장에 쌓여있다.
지금 당장 움직이고 싶지 않아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방을 나와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탁옆 간식창고에는 남편과 딸이 야무지게 챙겨다 놓은 과자, 빵, 초콜릿과 젤리들이 가득했다.
저것들은 유통기한을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과 함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으음~ 일단 배를 채우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 나를 일으켜 미간의 간격도 넓혀내며 라면을 고르기 위해 수납장을 열었다. 여러 종류의 라면과 국수, 국거리 밀키트, 팝콘이 뒤섞여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결심했다.
달걀 두 개 넣고 치즈 한 장 넣은 라면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오늘을 청소와 정리를 하는 하루로 의미 있게 보내기로!
우선 나의 책장과 책상을 털었다.
해도 너무하네. 어쩜 볼펜이 이렇게도 많이 모여있는 걸까?
좋아하는 펜을 볼 때마다 사들고 왔던 나, 기억이 가물거리는 곳에서 홍보용으로 주었던 펜과 포스트잇, 작은 문구사를 차려도 될 것 같았다.
크기가 다양한 가위 12개, 지퍼팩에 정리된 화사하고 귀여운 라벨 메모테이프 꾸러미가 나는 언제 쓰임 받냐는 듯 이쁘게 이쁘게 기다리고 있었다.
사치가 절대 아니라 일상의 작은 행복이라 우기며 당당하게 사다 모았던 펜시용품, 사무용품이 이 정도면 사치가 분명하다 아니 사치보다 더한 집착에 의한 습관적 지출이라 말해야겠다.
그땐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나빠서, 슬퍼서, 외로워서, 날이 너무 좋아서, 비가 와서, 눈이 와서, 문구류를 사러 나갔던 나를 말릴 수가 없었다.
사용할 수 있는 펜들인지 확인해서 사용 용도에 따라 분리 작업을 하고 나니 다시 출출해졌다.
산미와 과일향이 가득 담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로 커피를 가득 내려 쿠키와 함께 마시며 "와우~하하~ " 한숨을 길게 내어 놓았다.
역시 커피를 내리기 위해 사다 모은 것들 또한 ~ 만만치 않은 것이 커피를 마시는 나의 목구멍을 조여내게 했다. 주방은 다음날로 예약해 두기로 하고 책상과 책장, 옷을 정리하기로 한 방으로 이동했다.
광화문 교보문고, 북촌과 망원동 거리 소품샵, 제주의 어디 지역 작은 문방구와 독립서점에서 구매했던 엽서와 수첩, 노트들을 바닥에 깔아 두고 한참을 갈등했다.
내가 직접 사모은 것, 날 위해 누군가가 선물해 준것들, 행사장, 여행지에서 받은 추억이 담긴 안내 책자 하나하나 그때 그 시간 함께 했던 순간의 기억과 온도가 어쩜 그리도 선명한지 어떻게 나누어 정리해야 할지 버려야 할지 기준을 만들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남편이 날 생각해서 꾸준히 사주는 옷가지들 엄마가 선물해 주고, 생일과 기념일에 받은 스카프와 장갑들이 스타일이 잘 바뀌지 않고 블랙과 화이트를 고집하는 나에겐 안전하게 모셔두어 새것과 같은 모습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머뭇거림 속에서 한 스푼 단호함을 꺼내어 3/1을 덜어내고 늦은 밤 11시가 되어 정리가 끝났다.
다행히 남편은 시댁식구들과 여행을 떠나 있어 온전히 정리에 집중하며 추억을 간식 삼아 되새김질하며 뱃속을 두둑하게 채웠다.
책상과 책장 한면을 채우고 쓰임 받지 못한 채 한 뭉치 두 뭉치로 모여 있었던 것들은 필기도구와 노트의 이유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거 속 나의 모습 생활 속 기쁨과 슬픔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의 온도가 그대로 담긴 지금의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내 모습 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은희경 작가님의 표현 속에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물건들의 시간과 함께하며..]
[물건들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데에는 거기 깃든 나의 시간도 한몫을 차지한다. 물건에는 그것을 살 때의 나, 그것을 쓸 때의 나 그리고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으며 나는 그 시간을 존중하고 싶은 것이다. ] 깊은 공감으로 오늘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가며 정리했던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일상에서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는 나,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들 습관들이 긴 시간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변명할 수 없이 명확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고, 사랑스러운 나의 추억과 감정을 만나며 흐뭇하고 따듯함이 반가웠던 오늘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 선물하는 나도 나에게 선물해 준 이들 모두 너무나 사랑스럽고 고마운 마음이 풍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