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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Nov 02. 2022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여성' 또는 '여류' 소설가를 사랑하는 이유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많은 문학작품들을 섭렵한 다독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별히 문학에 애착을 갖는다. 문학이 없었다면 나의 일상은 얼마나 메말라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거의 매일처럼 접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부산국제영화제의 빛나는 영화들까지...  일상이 가진 즐거움의 가장  부분을 담당하는 영상 콘텐츠들 역시 문학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학생 때 매료되었던 기 드 모파상, 앙드레 지드, 안톤 체호프 같은 문학가들 뿐만 아니라,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밀란 쿤데라, 노벨상의 주역인 알베르 까뮈, 오르한 파묵 등... 4차 산업혁명이니, 초-국가의 시대니 하면서 급변하며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파고들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내게 이들 문학가들이 남긴 유산은 영혼의 베이스캠프이자, 쳇바퀴 같은 일상 속 권태와 허무의 포화가 쏟아질 때 정신의 몸을 숨길 방공호이기도 하다.


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장르는 단연코 소설이 아닐까. 언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담아낸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 또한 모국어의 차이에 취약한 시와 달리, 소설의 경우에는 적절한 번역만 뒷받침된다면 문장 속에 담긴 서사와 인물에 대한 통찰, 세상의 미추가 독자의 연상 능력, 상상력과 어우러져 독창적이고도 풍요로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곤 한다. "세계"라는 거창한 단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복합적이고 섬세한 정신세계와 셀 수 없이 다양한 감정과 행위의 동기들이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일명 '탁월한' 소설이 지닌 매력이 아닌가 싶다.


문학의 독자라면 어떤 작품을 우연히 접하고, 그 작품이 마음에 들어 같은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탐닉하듯 찾아 읽었던 경험이 있을 것인데, 나의 경우는 주로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해 그러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 소설가로는 박완서가 대표적이고, 일본 소설가로는 미우라 아야코, 영미 소설가로는 앨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러하다.


박완서와 미우라 아야코는 지난 20세기를 살다 간 가부장적 문화 전통 속에서 "여류문학가"로 두드러진 활동이 돋보이는 작가라는 점에서 존경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하는 작가들이라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동질감을 갖게 되는, 그래서인지 부러움까지 자아내는 재능을 소유한 작가에 속한다.  특히 여성의 존재에 관해, 정확히는 여성의 "마음"에 관해 치밀하게, 그토록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담아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한동안 나 자신이 이자벨이, 에미이가, 올리브 키터리지가, 루시 바턴이 되었다.


그런데 21세기 지금, 왜 하필 '여성 작가'인가, 왜 나는 여전히 여성 화자가 등장하는, 여성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 남성 독자들에게 묻는다면, 자신이 특정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로 그 작가의 성별이 '남성'이거나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작가는 남성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작가이기 때문에 좋다"?


몇 천년의 세월을 부계사회의 전통을 이어온 인류 역사에서 여성이 스스로의 젠더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과연 오게 될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불균형이, '불평등'이라 일컬어질 수도 있는 이러한 오랜 현상이 예술과 창작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약점이라고만 보이지는 않는다. "결핍은 창조를 낳는다"는 헤묵은 아포리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펜의 (또는 키보드의) 자유만 허락한다면 수많은 탁월한, 명민한 문학가들 중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바로 여성이 될 것이다. 바로 그 결핍과 자유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구간을 잘만 유지하게 된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 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중략)......사소한 모든 것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것.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은 베고니아를 예로 들면, 돌봐주지 않으면 말라죽을 대상으로 보는 대신, 아름다운 것, 꽃봉오리를 맺은 작은 식물로 보았다. 도티와 베브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사무실을 황무지 같은 장소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연들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저벨은 떠날 것이다. 그녀는 이 명확한 순간에 그것을 깨달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한편으로 거리가 멀어지는 데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중에서


"그러나 앤지에게 시간은 하늘만큼이나 크고 둥글었고, 시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바로 음악과 신을, 왜 바다가 깊은지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앤지는 오래 전부터 그러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중략).....제인은 평생 어린 시절의 고통을 떨치지 못했던 이 늙은 남자에 대한 애정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의 어머니는 언제나, 언제나 그에게 화를 냈다. 지금 이 순간도 제인은 그의 얼굴에서 의뭉스럽고, 늘 겁에 질린 어린 소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잠들어 있는 이 순간마저도 그의 얼굴에는 불안으로 긴장한 표정이 감돌았다. 행운이야. 재인은 장갑을 낀 손을 가볍게 그의 다리에 얹으며 다시 생각했다. 누군가를 수십 년 동안 알고 살 수 있다는 것은." -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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