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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Jun 25. 2023

영화 "삼천 년의 기다림"(2022)

이야기를 열망하는 사람

소원을 이루어주는 요술램프 속 지니.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쫓다 다다르는 길은 파멸뿐임을 보여주는, 꽤나 친숙한, 자비 없는 교훈을 담아낸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스펙터클로 채워진 이 판타지 영화는 의외로 순한 맛 로맨스 영화에 가까웠다.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닌, 여느 장식장에 흔히 놓여있을 법한 유리병의 정령 '진'은 단순히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책무의 도구로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진' 그 자신으로, 삼천 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의 자유를 때론 사랑을 갈망해 온 살아 있는 욕망의 주체로 등장한다.


진의 유리병을 소유했던 과거의 주인들은 주로 여인들로, 그녀들은 서로 다른 욕망을 고백하며,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후에는 주로 그를 배반하거나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를 망각의 심연 속으로 유기해 버린다. 그렇게 삼 천년의 망각을 이겨낸 '진'은 결국 유리병의 마지막 주인, 현명하고 사려 깊은 여주인공 '알리테아'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얻게 된다.  


다소 고지식해 보이는 서사학자 알리테아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그 어떤 것도 공짜로 얻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야만 끔찍한 유리병 속 암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은 삼 천년 간 이어진 자신의 굴곡진 사연을 털어놓으며 그녀가 소원을 말해주기를, 그래서 스스로도 바유를 얻기를 위해, 그녀를 설득하려 한다. 그녀의 완강한 절제심은 결국 진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과정에서 스르르 녹아버리고 만다. 그녀의 마음을 연 것은 끊임없이 실패로 귀결되었음에도 변치 않는 소명감과 순전함을 내비친 진의 이야기, 그와의 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끝내 진에게 "당신의 사랑을 원한다"는 전에 없던, 새롭게 탄생한 유일한 소원을 털어놓고야 만다.

제피르(Zefir)와 진의 대화
알리테아(Alithea)와 진의 대화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무수한 여인들이 진의 과거사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 여러 인물들 중 유일하게 내 흥미를 끈 인물은 결국 '진'이 자신의 요술 유리병으로 이끄는 데 실패한 한 남성, 그래서 그를 오랜 세월 망각 속에 버려지게 만든 장본인, 진과 같은 정령의 혈통을 지닌 '무라드'라는 인물이었다. 잔혹한 폭군인 무라드를 매혹시킨 인물은 한 이야기꾼 노인이었고, 유일한 친구를 노환으로 잃은 후 점점 시들어간 그의 최후는 정령 '진'이 후에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 '제피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맞닿게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 이들 정령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사명이자 갈망은 타인의 '소원'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진과 제피르의 모습, 진과 알리테이아의 모습은 무라드와 이야기꾼 노인이 함께 있는 모습과 연결된다. 흰 수염이 덥수룩한 가녀린 노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반짝이는 제왕 무라드의 모습은 이야기에 대한 갈망을, 그 강력한 사랑을 표상한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말아 달라고 졸라대는 아이의 모습에서 보이는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오늘날엔 꽤나 경시되어 온 인간적 욕망의 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질적 소유, 부와 권력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현대적 욕망의 대표주자들에 밀려 사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욕망이 바로 이 이야기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노골적이지 않음에도 강력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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