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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May 11. 2023

영화 "겸손의 의미“(2013)

고요한 투쟁의 방식에 관해

올해 부산국제단편영화제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전주국제영화제와 같은 시기에 열렸기 때문인지 부산 영화인들의 발길을 끄는데도 실패한 분위기다. 5월 1일, 영화제 마지막 날, 동료에게 얻은 초대장 두 장을 들고 영화의 전당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영화의 전당 야외광장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DJ 페스티벌" 준비 중이라는 사인물이 보인다. '설마 벌써 끝난 건가' 의심 어린 마음으로 바리케이드 가장자리를 따라 광장을 빙 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제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예상대로 관객은 많지 않았다.


홀대받는 영화제에 홀로 참석하는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다. 밀집된 군중들을 피해 조용한 환경에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마지막 날 11시와 오후 2시, 내가 본 영화는 "아시안 아메리카나"와 "BISFF 역대 해외수상작". 각각 다섯 편, 네 편씩, 15분에서 30분 정도 짧은 러닝타임의 단편영화가 연달아 상영된다. 아홉 편의 단편영화는 대부분 마음에 들었고, 모처럼 독창성과 창작열을 수혈받는 기분이랄까, 세계 각지의 창작자들이 담아낸 짧지만 밀도 있는 플롯, 미장센, 음악, 배우의 연기를 짤막하게 음미하는 과정이 황홀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면 2013년도 영화 "겸손의 의미". 이 한국어 번역뿐만 아니라 영어 제목인 "My Sense of Modesty" 또한 원제의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Où je mets ma pudeur", 직역하면 "내 수치심은 어디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지금은 꽤 두둑한 필모그래피를 지닌 북아프리카계 프랑스인 여배우 하프시아 헤르지(Hafsia Herzi)가 10년 전 주연한 이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도 하프시아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그녀에게 졸업 시험 발표장에서는 머리에 두른 스카프를 벗어야만 졸업을 시켜주겠다고 말하는 무례한 교수는 2023년의 관점에선 다소 낡아 보이는 설정이긴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끈 것은 그러한 폭력에 응답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었다.


영화는 하프시아가 자신의 졸업시험 주제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응시하는 장면을 여러 방식으로 보여준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실물을 보는 장면은 물론, 작품 이미지가 실린 도록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가만히 살펴보는 모습에는 집중력이 담겨있다. 결국 발표장에 들어가기 직전 스카프를 벗기로 결심한 하프시아는 까만 머리카락을 내보인 채 결연한 표정으로 앵그르의 작품이 영사되는 커다란 스크린 앞에 선다. 세 명의 심사 교수들과 마주 보고 선 그녀는 화가의 의도를 중심으로 작품 해설을 시작한다. 당대 여성 누드화를 그린 수많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앵그르 역시 오달리스크(오스만제국 술탄의 시중을 들던 시녀)를 가능한 에로틱하게 묘사하기 위해 피부색과 신체 비율을 왜곡했다는 등. 이렇게 교과서적으로 작품을 기술하던 그녀는 발표를 마치기 전, 갑자기 그림 속 주인공 오달리스크가 했음직한 생각을 웅변하듯 해설한다. 나체로 몸을 모두 드러낸 오달리스크가 감추고 있는 단 하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이라는 점을 짚어 낸 하프시아는 오달리스크에게 이 신체 부위가 갖는 각별한 의미를 설명한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처럼 나체로 앉아 있는 하프시아의 뒷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스카프에 감춰진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는 그녀의 곁에 다정히 다가가는 남자친구의 모습까지도. 에로틱한 장면이다.


“자유”에 대한 서로다른 해석, 억압당하는 자의 싸움, 몸에 대한 권리, 수치심의 강요, 강요된 신념만큼이나 폭력적인 "자유"의 얼굴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조용하지만 평화롭지만은 않은 그런 순간들을 단정히 담아낸, 아름다운 영화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앵그르의 작품을 바라보는 하프시아의 앞모습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 하프시아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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