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케빈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가끔은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사건들을 목격하곤 한다. 대한민국 땅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는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가, 2022년 10월의 이태원 참사가 그런 일들에 해당될 것이다. "세월호"라는 단어에 10년 가까이 지난 이제 비애의 흔적은 흐릿해졌을지언정,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비극의 원인을 둘러싼 물음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얼룩을 남기고 있다. 살아남은 이들의 부채의식은 끊임없이 그 사건에 관해 말하기를, 질문하기를 요구받는다.
1999년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미국 콜로라도주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기난사 사건은 아마 미국인들에게 그런 류의 사건이 아닐까. '민간인의 총기 소유 허가'라는 어른이 만든 제도와 교육 시스템 속에서, 증오와 혐오, 복수심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잔혹함이 만나 무고한 젊음의 대량 학살을 낳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인 이러한 비극을 목격해 온 어른들은 다큐멘터리를 통해, 영화를 통해, 소설을 통해 계속해서 물음을 제기하고, 담론을 생성하는 중이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Bowling for Comlumbine, 2002)나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Elephant, 2003) 같은 작품들이 이 사건을 직접 조명한데 반해, 2011년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는 가해자의 살상도구가 '총'이 아닌 '활'이라는 점에서 실제 사건을 재현하기 보다는 모티브 정도로 삼는 듯하다. 소설 원작의 이 영화는 어른이 조성한 세계 안에 살아가는 아이들은 결코 어른들이 예측한 방식으로만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치밀하게 조명하면서도, '시스템' 또는 넓은 의미의 '환경'이 아닌 지극히 내밀한 아이와 양육자의 인간적 '관계'에 주목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훗날 교내 대량학살의 가해자가 될 것으로 예측되는 케빈의 어머니 에바(Eva)다. 사건 이후 숨어 살다 시피 하는 에바의 현재, 그리고 아이를 낳기 전부터 기르는 과정까지의 과거 사건들은 순차적으로 교차된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은연중 '살인자를 길러 낸 어머니의 과실'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내려는 욕망을 발동시킨다.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지연 혹은 좌절된 꿈. 애초부터 에바에게 케빈은 기쁨이 아닌 부담이자 실패였음을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놀랍도록 영민한 그녀의 아들은 유아 시기부터 마치 이 진실을 꿰뚫고 있듯이 어머니의 무정에 교활하고 냉혹하며 순수한 '행동'으로 대답한다.
어쩌면 좌절된 것일지도 모를 에바의 꿈이 담긴 세계지도에 물감을 휘갈기는 케빈은 어머니의 책이 진열된 서점 쇼윈도를 한동안 응시하기도 한다. 추위 속에서도 반팔 티셔츠 한 장을 걸치고 초라한 행색을 고집하거나, 잘못된 음식을 먹는 아이를 그냥 놔두는 엄마의 지나친 존중 혹은 방임은 아이를 향한 냉담함에서 비롯한 것인지, 손쉬운 단념에서 비롯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목청이 터질 듯 울어대는 신생아를 가슴에 품어 안을 줄 모르는 에바와 케빈의 거리는 아이가 사춘기 소년이 될 때까지 지속된다.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이 거리감.
모성 신화를 탈신비화했다고 일컬어지는 영화답게, 영화 속 에바의 모습은 보통의 평범한 어머니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적인 사례인 산후우울증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머니가 아이에 갖는 양가적인 감정은 아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경험하고 있지 않을까. 끔찍한 사건 이후 에바의 삶 전체는, 그녀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크게 변모하는데, 예상되듯이 속죄하는 자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웃들이 가하는 린치라든가 직장 내 성희롱조차 피하기는커녕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약간의 안도감 마저 느껴졌다면 비약일까.
끔찍한 그 사건 이후, 살인자의 어머니라는 평판 속에 텅 빈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살아가는 에바는 비로소 케빈에 관하여 깊이 생각한다. 어쩌면 케빈이 진정으로 원했을지도 모를 그녀의 관심은 아이가 감옥에 간 이후 비로소 시작된 것만 같다. 태어난 순간, 아니 그 이전부터 기꺼이 유지해 오던, 적당한 무신경이 낳은 아이와의 거리감이 영화의 마지막 면회 장면에서 조금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아이의 표정은 최초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케빈의 흔들리는 눈빛에 담긴 인간성, 그것은 연약함이었다.
비극을 낳고 길러내는 이 세계를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애도의 방식이든, 뉘우침의 방식이든, 치유의 방식이든, 영화의 원제가 주장하듯, 치열하게, 우리는 케빈에 관해 말해야 한다.(We need to talk about Ke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