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성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
[에피소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됨]
2020년 넷플릭스 시리즈 <크리미널: 영국> 편의 시즌2는 총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오직 경찰의 심문실 안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짧은 에피소드들은 협박, 강간, 살인 등 범죄 용의자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다. 줄리아, 앨릭스, 대니엘, 산디프.
2화 "앨릭스" 편은 부하 여직원을 강간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는 남자 앨릭스를 주인공으로 한다. "왕좌의 게임"의 존 스노우 역할로 잘 알려진 킷 해링턴 Kit Harington이 분한 앨릭스는 다소 오만한 태도와 미묘하게 여성차별적인 언행으로 여성 경관 나탈리 홉스(캐서린 켈리 Catherine Kelly 분)의 심기를 거스른다. 그의 행동을 지적하며 "우리가 얼마나 남을 섣불리 판단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라고 말하는 나탈리는 하지만 자신 역시도 뚜렷한 증거 없이 알랙스가 범죄자일 거라는 짐작을 전제로 심문에 임하는 모순적인 면을 보여준다.
결국 의외의 장소에서 이 사건이 일종의 자작극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나타나고 앨릭스는 '혐의없음‘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의 무죄가 드러나게 되는 복잡한 여정을 차치하고 이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에 등장한다. 5시간 동안 길게 이어진 심문 끝 나탈리는 앨릭스에게 당신은 이제 귀가해도 된다고 통보한다. 하지만 자리를 떠나는 심문관을 불러 세우며 앨릭스는 "나의 동료들과 고객들이 모두 보는 곳에 들이닥쳐 나를 범죄자로 끌고 갔던 그 회사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가 일상을 살아가라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자리에 남아 있던 수사관은 “당신을 향한 내 관심은 이미 3분 전에 사라졌다."는 냉담한 답변만 돌려줄 뿐이다.
"당신들이 돌아와 내 동료들과 가족들에게 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증언해달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앨릭스는 결국 청원경찰에 의해 심문실에서 쫓겨나고 만다.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혐의만으로 불명예와 치욕을 뒤집어쓰게 된 그를 과연 누가, 무엇이 구제해 줄 수 있을까? 이 에피소드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막을 내린다. 정의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개인의 존엄성이 희생되는 것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을까? 궁극적 정의 실현을 위한 부수적 피해 정도로만 여기기에 그 상처가 너무 깊다면? 아니,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닌 상처였다면?
이틀 전, 한국의 출중한 영화배우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여기는 이유는 마약 범죄수사를 빌미로 한 사법 권력, 경찰 권력, 그리고 그 권력에 빌붙은 언론이 한 사람의 존엄성을 얼마나 짓밟았는지 모두가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앨릭스의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한 인격 훼손은 현재의 파국을 예견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투석형(돌을 던져 죽이는 사형방법)"에 비유한 누군가의 말처럼 권력기관에 의해 광장에 떠밀린 그는 끔찍하게 천박한 언론과 냉담한 대중의 호기심이 던진 돌무더기에 깔려 죽은 것에 다름 아니다. '사생활 침해가 지나치네...' 하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자극적인 제목의 인터넷 기사를 클릭한 며칠 전 내 손에도 그 돌이 들려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땐 왜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을까, 벼랑 끝에 몰린 한 사람의 명예를...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동료인 한 인간의 존엄성을...